내가 먹은 모든 것은 내 안에서 부활한다.
내가 먹은 모든 것은 내 안에서 부활한다.
내가 먹은 음식은 모두 내 속에서 부활한다.
내가 먹은 음식이 내 몸에서 부활하며 내 살이 되고 피가 되며 뼈가 되는 것이다.
부활이란 무엇인가?
내가 김치를 먹으면 그 김치를 내 몸에서 소화 흡수하여 내 살이 되고
내 피가 되고 내 머리칼이 되는 것이다.
내가 콩을 삶아서 먹으면 콩이 내 몸속에서 부활하여 내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부활하지 않는 것은 없다.
소고기를 개가 먹으면 소가 개고기가 되어 부활한 것이다.
밀을 가루 내어 국수를 만들어 먹고 그것이 내 살이 되고
얼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이 부활이다.
부활이 무엇이 그리 대단한 것이겠는가?
밭에 준 똥거름이 부활하여 고구마도 되고 마늘도 되고 생강도 되고
쌀도 되고 보리도 되는 것이 부활인데 무엇이 그리 대단한 것이겠는가?
옛글에 '비단잉어 하나가 연못에서 즐겁게 노는구나.
그런데 그 비단잉어가 수달이 되었구나' 하는 식으로 쓴 글이 있다.
사람들이 그 글을 읽으면 실제로 잉어가 수달로 둔갑한 것인 줄 알 것이다.
그 다음에는 '저 수달이 이제 늑대가 되었구나'라고 한다.
늑대가 수달을 잡아먹은 것이다.
늑대가 죽어서 독수리한테 먹히면 독수리가 되는 것이다.
독수리가 죽어 들쥐한테 먹히면 들쥐가 되는 것이다.
나는이런 글을 읽어도 전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런 것이 부활이다.
무엇이든지 부활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사람이 돼지고기를 먹으면 돼지고기가 그 사람의 몸 속에서 부활한 것이므로
그 사람은 돼지의 권속이 된다.
사람이 돼지의 고기를 먹었으므로 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돼지가 먼저다.
늘 먹히는 쪽이 먼저인 것이다.
실을 짜서 천을 만들고 그 천으로 새 옷을 짓는다.
그런데 치마를 잘라서 저고리를 만들면 그것은 넝마가 된다.
다른 사람이 입던 옷이 넝마다.
넝마는 너덜너덜한 것을 여기저기 기운 것이다.
나는 새로 만든 옷을 좋아한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새 옷보다는 넝마를 더 좋아한다.
사슴은 풀만 먹고 자랐으므로 사슴 고기는 새로 지은 옷과 같다.
그러나 그 사슴의 고기를 사람이 먹으면 넝마가 되는 것이다.
사슴이 풀을 먹고 거친 천을 짓건 고운 천을 짓건 상관없이 그것은 새것으로 만든 천이다.
그러나 그 사슴을 잡아먹은 곰의 고기를 먹으면 넝마가 되는 것이다.
나는 새 옷을 좋아하지 넝마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풀이나 나무에서 난 것을 먹으면 새 옷을 지어 입는 것이고
풀이나 나무에서 난 것을 먹은 소고기를 먹는다면 너덜너덜한 것을
덕지덕지 기운 넝마를 입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새 옷을 입을 것인지 넝마를 입을 것인지는 내 손에 달려 있다.
'최진규의 약초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