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uality/人物

탤렌트 김혜자 권사의 금연과 목사 임종석의 금주 사연

天上 2019. 8. 3. 08:55

임종석 목사

딸의 새벽기도와 엄마의 금연

얼마 전 국민배우에 국민엄마라는 수식어로도 모자라 국민여친이라고까지 불리게 된 탤런트 김혜자 권사의 금연 이야기가 온라인상에 심심찮게 올라온 일이 있었다. 필자는 어쩌다 당사자 김혜자 권사가 쓴 자신의 금연에 관한 간증문이랄까 수기랄까… 하여튼 그런 글을 읽게 되었다. 읽고 난 필자의 영혼은 약한 전류에 감전이라도 된 듯 자극을 받아 꿈틀했다. 필자의 금주가 김혜자 권사의 금연과 오버랩 되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먼저 김혜자 권사의 글부터 소개해 본다.

내가 담배에 처음 손을 댄 것은 스물 셋, 첫 임신 때였다.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 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입덧이 심했다. 보다 못한 남편이 “담배를 피워보면 좀 괜찮아 진다더라”며 권했다. 임신한 몸에 담배라니! 그래도 너무 고통스러워 조금씩 피우며 울렁거림을 달랬다.

입덧이 끝난 뒤 멀리 했던 담배가 다시 생각난 것은 출산 후 몇 달이 지나서였다. 가족 몰래 화장실에서 조금씩 피우던 게 어느새 습관이 돼 버렸다.


그 후 30여년간 나는 담배의 힘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 한 잔과 함께 담배 한 대를 무는 것이 일과의 시작이었다. 집에서나 방송국에서나 늘 내 손에는 담배가 들려있었다. 대본 연습이나 촬영을 할 때 잘 되면 기분이 좋아서, 안 되면 속이 상해서 담배를 피우고 또 피웠다. 오죽했으면 연예인 ‘체인 스모커’를 뽑을 때 늘 1위를 차지하곤 했을까.


나는 흡연가라기 보다는 애연가였다. 담배를 물었다 하면 필터만 남을 때까지 피웠고, 폐 속 깊숙이 연기를 빨아들이며 참 맛있게 피웠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담배만은 포기할 수 없어서 교회에 갈 때마다 “하나님, 이것만은 좀 봐주세요”라고 기도하곤 했다.


그런 내게 ‘사건’이 일어난 것은 6년 전 이맘때였다. 여느 때처럼 아침에 일어나 담배부터 피워 물었는데, 이제껏 피던 그 맛이 아니었다. 깜짝 놀라 껐다가 다시 불을 붙이기를 거듭했지만 쓰고 역겨운 맛뿐이었다.

그날 밤 미국 사는 딸이 전화를 했길래 “고은아, 정말 이상하다, 담배 맛이 싫어졌다”고 말했더니 딸이 갑자기 “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하나님이 아름답게 지어주신 몸을 담배 따위로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하나님에게 기도했는데, 이렇게 빨리 들어주실 줄 몰랐어.”

저 날 때부터 담배를 피워 온 엄마에게 차마 끊으라는 말은 못하고 무려 백일 동안 남편에게 아이 맡기고 새벽기도를 다녔다는 딸아이의 말을 듣고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날로 담배와의 길고 긴 인연이 끊겼다.

다행히도 금단 현상이 전혀 없었다. 누가 바로 옆에서 담배를 피워도 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군것질이 늘어 살이 찐다든가 하는 부작용도 없었다.


담배를 끊고 가장 좋은 것은, 나를 구속했던 그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느낌 그 자체이다. 늘 따라다니던 만성 두통도 씻은 듯 사라졌다. 피부도 몰라보게 좋아져 나이를 감추려고 두껍게 화장할 필요도 없어졌다. 요즘도 목욕탕에 가면 사람들이 “어쩜 그렇게 피부가 고우냐”고 부러워한다.


사실 남들에게 담배 끊은 사연을 얘기하면 잘 믿질 않는다. 누구는 “보기보다 독하다”고도 한다. 하지만 30여 년 간 단 한 번도 끊어야겠다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내가 거짓말처럼 한 순간에 금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딸의 기도를 들어준 하나님의 힘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요즘 젊은 여성과 청소년의 흡연이 늘고 있다고 한다. 나쁜 걸 알면서도 혼자 힘으로는 끊기 힘든 게 담배다. 그들의 가족 중에 기독교인이 있다면 사랑하는 아들, 딸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라고 권하고 싶다. 가족의 관심과 사랑보다 더 큰 힘은 없다.

 

영혼이 있고 천당과 지옥도 있다면

네 영혼이 갈 곳은…필자는 20대 초반에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 그 좋아하던 술을 끊었다. 아니 이는 사실이 아니다. 사실과 좀 다르다.

필자는 J시 소재 실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골 집에 돌아와 별로 하는 일도 없이 빈둥거리며 세월을 허송하고 있었다. 그러다 군대에 갈 생각이었다. 입영통지를 받고 입대 일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을 무렵, 두어 살 위의 군에 간 한 동네 선배가 휴가를 왔다.

‘야, ○○야, 군대 가면 어떻게 해야 편하냐?’

동네 앞 길가에서 만난 그에게 필자가 물었다. 선배이니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것이었으나 그때의 필자는 그처럼 싸가지가 없었다. 싸가지만 없는 게 아니라 몹시 이기적이기까지 했다. 나만 좋으면 좋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훈련소에 가면 교회에 다닌다 하라 했다. 그러면 교회에 가는 시간만이라도 사역병을 면할 수 있고 욕설도 듣지 않아 좋다 했다. 그렇다는데 마다할 필자가 아니었다. 논산훈련소로 입대한 필자는 그렇게 해서 교회라고 하는 데에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훈련을 마친 필자는 전방의 한 부대로 배속되어 갔다.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문혜리에 자리 잡고 있는 12TANK 3중대였다. 필자는 그때 탱크를 난생 처음으로 봤다. 기갑학교도 거치지 않고 전차부대에 간 것이다.

어떻든 필자는 거기에서도 교회에 나갔다. 중대단위이니 부대 내에 교회가 있을 리 없어 2km쯤 떨어진 면소재지의 민간인 교회에 네댓 명의 전우들과 같이 다녔다. 믿음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지만 철조망 밖의 공기도 마실 수 있고 교인 아가씨들의 분 냄새도 맡을 수 있어 외출이라도 나가는 기분으로 다녔다.


그런데 한 1년을 그렇게 다니다 보니 하나의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말로 신(神)이라는 것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교회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냥 영적 존재로서의 신이었다. 있다면 인간에게 영혼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영혼이 있다면 천당과 지옥도 있는 것이 아닐까. 의문은 꼬리에서 꼬리를 물었다. 그렇다면 임종석 너의 영혼은 어디로 가겠느냐? 물으나 마나였다. 만약 천당과 지옥이 있다면 지옥행이 분명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필자는 천당엔 그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필자는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필자는 어렸을 때 동네 할머니들로부터 지옥은 사람의 발을 잡아 몸을 거꾸로 하여 기름이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었다 건졌다 하는 곳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설교에서 들은 성경의 지옥은 유황불도 꺼지지 않는 곳이었다.

두려움은 상당히 오랜 기간 계속되었다. 보초를 선다든가 하는 혼자만의 시간에는 어김없이 그 무서운 지옥이 머리에 떠올라 자신을 괴롭혔다. 언젠가는 반드시 영혼문제를 해결하리라 생각했다.


하나님을 처음 만난 일대사건

제대를 하고 고향에 돌아와 보니 친구들이 모두 서울로 돈벌이를 하러 떠나고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느느니 마시는 술의 양이었다. 위가 배겨나지를 못했다. 안되겠다 싶어 건강을 위해 술을 좀 참아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때 영혼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교회를 찾았다. 다니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도하기 위해서였다.

고향의 교회는 도로변 하천부지에 있었다. 옆에 사택과 또 한 채의 민가가 있을 뿐으로 외딴곳이었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에 아무도 없는 예배당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신이여, 있으면 나타나 주세요. 그러면 믿겠습니다.’ 기도라 해도 이 같은 엉뚱한 내용이었다. 기도 대상도 하나님이 아니라 신이었다. 며칠 밤인가를 계속 다니며 그런 기도를 했으나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그런데 점차로 자연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계절의 변화, 똑 같은 하루의 길이, 콩 심은 데에서 콩이 나고, 감나무에서 감만 열리지 밤이 열리지 않는 질서 등등, 수없이 전개되는 질서들의 연결 고리는 우연일 수가 없었다. 창조주의 손길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고 또 다른 과정을 좀 더 거친 후 바로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야, ○○야, 군대 가면 어떻게 해야 편하냐?’ 이 말은 지금 생각하면 필자가 했으나 필자 스스로 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것이었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필자가 하나님을 처음 만난 일대사건이었다. 필자는 그 동네에서 처음으로 크리스천이 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불모지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필자를 찾아와 불러주신 것이다. 필자는 지금도 그때의 생각을 하면 고마움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한다. 하나님께서 그때 그렇게 불러주시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몸서리가 쳐진다.


천지만물의 창조주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필자는 망설임 없이 고향의 그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하자 농사일 등 집안일도 열심히 하게 되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니 그래야만 했다. 사람들은 그런 필자를 보고 교회에 다니더니 사람이 달라졌다 했다.


그러나 한 해의 농사일을 하고 보니 그건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농사일이라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힘은 농사꾼들의 배나 드는데 그 성과는 그들의 3/1도 나지 않았다. 필자는 그때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러다가는 제 밥벌이도 못하는 얼간이가 되기 십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직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별일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작심을 해도 작심삼일이 아니라 하루도 못 갔었는데, 밥 먹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공부에 매진할 수가 있었다. 집중력도 대단했다. 이때 길러진 집중력은 훗날 유학을 갔을 때 지도교수가 인정해 줄 정도였다.

 

참 더디게도 이뤄 받은 기도

그렇게 공부한 보람이 있어 필자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는 그런 제도가 있었다. 그때의 교육대학은 2년제였는데, 교사가 된 필자는 방학 동안에 공부하는 계절제 8학기의 4년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야간대학 2학년에 편입하여 주경야독으로 졸업했다. 남들은 4년이면 얻는 대학 졸업장을 필자는 7년이 걸려 받게 되었다.


그리고 시험을 거쳐 정부의 파견에 의해 일본에 가서 공무원 신분으로 3년간 일하고 귀국 후, 다시 일본에 가 대학원 석‧박사 과정을 마치는 데에 5년이 걸렸다. 그 후 학위도 받고 대학교수도 되었다. 대학재직 때 신학대학원 야간부에서 신학을 하여 목사도 되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숨 가쁘게 지낸 세월이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실업고 졸업이 받은 학교교육의 전부인, 꿈도 없고 못나기 이를 데 없는 농촌의 한 더벅머리 총각을 붙드셔서 강행군을 시키신 것이다.


그런데 국민학교 교사시절, 초임교가 고향의 모교였는데, 집에서 2km쯤의 거리로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다. 필자가 다녔던 예의 그 교회, 그러니까 필자의 모교회는 집과 학교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었다. 필자는 출근길이면 교회에 들러 잠깐씩 기도를 하곤 했다. 술을 끊게 해 주시라는 기도였다. 좀 전에 술을 끊었다고 했는데, 무슨 말이냐고들 하시겠지만, 그런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필자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건강 때문에 교회에 다니기 직전부터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사단이 생겼다. 다른 큰 죄는 지으며 의식조차 않는 교인들이 유독 술과 담배(酒草)에만은 민감하게 굴었다. 교인 중 누군가 술을 마시는 것이 발각이라도 되는 날엔 마치 중죄인이라도 되는 것 같은 취급을 했다. 꼭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 한 잔 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큰 죄라고… 하는 반발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 필자에게는 잘 알고 지내는 다른 교회의 처녀 전도사가 한 사람 있었다. 그녀와 J시의 거리를 걷다가 필자는 상대방의 팔을 잡아끌어 선술집으로 들어가서는 막걸리 한 잔을 시켜 들이키고 술값을 치르게 했다. 전도사이니 주초를 죄악시하는 교인들의 대표쯤으로 여겨 당해 봐라 하는 심리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게 발단이 되어 필자는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이게 아닌데 싶어 끊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이미 어렵게 되어 있었다. 워낙 좋아하는 술인지라 끊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출근길에 교회에 잠깐씩 들려 기도를 한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기도를 좀 더 열심히 한 날은 어김없이, 라 해도 좋을 만큼 술 마실 일이 생기고, 그러면 술 한 잔 한다고 무슨 죄가 되겠느냐는 생각이 앞서 기도 때 그처럼 단단히 한 각오와 결단은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기를 십 수 년이나 이어 했다. (그 비슷한 생활은 국민학교를 그만 둔 뒤까지 이어졌다.)


필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의지가 그렇게 박약한 사람이었다. 필자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끈질기다는 의미로 독종이라고 했고, 필자 자신도 그러려니 생각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그것은 필자의 의지로 그리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그리 인도해 주신 것이었다.


어떻든 그러던 중 어느 날이었다. 무엇인가를 놓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을 때였는데, 필자는 J시 J천변의 한 교회 앞을 지나 그 근처의 다리를 걸어 건너고 있었다. 그때 뜬금없이 ‘지금 주초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하는 생각이 들더니 술이 머리에 떠오르면서 ‘우웩!’하고 헛구역질이 났다.

그 뒤로는 술의 생각만으로 헛구역질이 나거나 속이 메슥거리는 일이 많았다. 술은 생각만으로도 고역이었다. 성찬식 때 받은 포도주로 속이 거북해지는 일도 많았다. 전에도 담배는 즐기는 편이 아니었으나 술을 마시면 몇 대씩 피우곤 했는데, 그것도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자신의 금주 사연을 거의 잊고 있었는데 김혜자 권사님의 간증수기를 읽고 그게 되살아나며 영혼이 꿈틀거림을 느끼게 되었다. 요즘은 그 두 사건이 기도에 적잖은 도움이 되고 있다. 멀리 미국에서 드린 딸의 백일간의 새벽기도를 들으시고 한국에 있는 엄마의 담배를 끊게 해 주신 하나님, 10년도 훨씬 더 넘은 기도에 꿈쩍도 안하시더니 당신의 때가 되서야 필자로 하여금 술을 금하게 하신 하나님, 그 같은 하나님을 생각하면 기도를 하며 이 기도도 이루어 주시라는 믿음이 더욱 굳어지는 작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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