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심장내과 의사이며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던 버나드 라운 박사는 어렸을 때 썰매를 타다가 허리를 다쳐 거의 평생을 좌골신경통 때문에 고통스러워 했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어떤 때는 며칠을 꼼짝 않고 침대에 누워 지내야만 할 때도 있었다. 급기야 박사는 수술을 했고 수술 후에는 격심한 통증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불편한 통증은 계속 이어졌다.
박사는 1973년 미국 심장학자 대표단의 일원으로 처음 중국을 방문하게 된다. 시애틀과 도쿄에서 연료보충을 위해 비행기가 잠시 착륙한 것을 제외하고는 보스턴에서 광둥까지 긴 시간을 날아가서 도착하자마자 요통이 발생해 꼼짝도 할 수가 없게 된다. 함께 간 8명의 의사들은 미국에서 내로라 하는 특출한 권위자들이었으나 요통으로 움직일 수 없는 동료 의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가 치통의 진통제인 타이레놀과 코데인을 건네 주는 것이 박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주최측의 중국 의사들이 격심한 요통으로 고통받고 있는 라운 박사를 위해 건장한 중국인 두 명을 불러 들여 라운 박사의 두 다리를 하나씩 잡고는 양쪽으로 잡아 당기는데 라운 박사는 여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통증때문에 중단시키고 이제는 괜찮다고 하고는 그들을 내보낸다. 초죽음이 된 라운 박사는 침이라도 맞게 해달라고 중국측 의사들에게 요청을 하게 된다.
사실 라운 박사는 침술이 질병을 고친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 당시의 다른 의사들처럼 냉담할 수밖에 없었다. 침술은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중국의 문헌을 터무니 없이 과장된 것이라 여겼고, 침술이 수천 년동안이나 시술되어왔으면서도 침술의 효과를 뒷받침할만한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은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라운 박사에게는 침술이 엉터리의 의술이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침이라도 맞아야겠다며 침술사를 불러줄 것을 요청한 것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으리라.
하여튼 자그마한 키와 마른 체격을 가진 침술사가 들어와 라운 박사를 엎어져 누워있게 한 후 양쪽의 엉덩이에 길고 가는 침을 꽂은 후 이리저리 돌리면서 자극을 가한다.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에 대해 실망감을 나타낸 침술사는 침을 뽑아서 재차 엉덩이에 꽂고 후비적 거리자 라운 박사는 엉덩이에서 뻐근한 침감을 느끼게 되고 이를 알아차린 침술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침을 뽑아낸다. 그리고 라운 박사에게 일어서서 걸어보라고 요구하자 박사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다고 그대로 엎어져 있으려니까,
침술사는 걸을 수 있다고 하며 일어설 것을 거듭 요구 한다. 마지못해 라운 박사는 일어서기 위해 몸을 움직이자 희한하게도 통증이 없어지게 된 것을 느끼게 된다.
그 후 라운 박사는 중국에 머물며 세미나와 관광을 하는 동안 한 번도 요통이 재발하지 않았으며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일년 동안은 아주 편안하게 지내게 된다.
라운 박사가 직접 체험한 침술의 효과를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었다면 여전히 믿지 않았을 것이라고 술회한다. 박사는 침술로 요통의 격심한 통증이 없어지자 박사 자신의 정신신경적인 문제가 있었든지(플라시보 효과를 말함), 아니면 침술의 효과가 있다는 객관적 증거이든지 둘 중의 하나라며 박사는 후자를 택하고 싶어 한다.
"기적은 없다. 단지 법칙을 모를 뿐이다"라는 성 어거스틴의 말을 되뇌이며 박사는 침술을 더 이상 엉터리로 생각하지 않고 침술에 대해 과학적으로 탐구를 하기 시작하게 된다.
나의 모친이 작년 초 겨울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뇌졸중으로 쓰러지더라도 대부분의 환자들은 생명력을 오랜 동안 지속한다. 몸이 부자유스럽지만 불편한 몸을 이끌고 여기저기를 다닐 수도 있다. 그런데 나의 모친은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부터 피골이 상접하여 거동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나의 동생 집에서 쓰러졌는데 바로 서울의 한 병원으로 이송을 했다. 응급조치 후 3일 간의 치료비와 검사비, 입원비가 150여 만원이나 청구 되었다. 그러고도 기약도 없는 장기간의 입원이 불가피했고 더구나 간병인까지 구해야 한다는 병원측의 설명에 실직상태에 놓여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퇴원을 시켜 나의 집으로 어머니를 모시기로 했다. 주치의가 젊은 여의사였는데 나보고 퇴원 후 어떻게 할거냐고 묻기에 내가 어머니의 대소변 수발할 것이며 아울러 침치료를 할 것이라고 했다.
물론 내가 직접 침 시술을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여의사의 표정이 일순간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엉터리의 침을 맞게 하느냐고 나를 심하게 질타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는 여의사를 바라보며 '저 여자는 언제쯤이면 철이 들라나? 언제쯤 진정한 의사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려나?'
침 치료를 받니 안 받니하면서 그 여의사와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퇴원의사를 밝힌 후 수속을 밟아 나의 어머니를 집으로 모셨다.
반면에 내가 속해 있는 한국칠술연합회에서는 대한신경정신과의사협회와 협조관계를 맺고 의사들은 침술을 익히고 침술연합회 회원들은 신경의학을 공부를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침구관련 단체에서도 의사들을 상대로 하는 침술 수련과정에서 많은 의사들이 침술을 배우고 있다는 것은 이 나라의 의사들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리라 믿는다.
2008, 12, 30
[출처] 침술에 매료된 두 의사 이야기|작성자 우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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