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 왕 (깡패,안악산 호랑이)김 익두 목사 한 세기 전. 김익두 목사. 굴곡진 역사 속에서 그가 증거 한 것은 한국 초대 교회 유명한 목사님 중 김익두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려고, 고개 너머의 교회로 가는데, 너무 너무 더워서 산꼭대기에 올라가서는 그만 웃옷을 다 벗고 나무 그늘에서 평안히 쉬게 되었다. 그 때 맞은편에서 술이 건아 하게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올라오는 것이다. 그 사람이 김익두 목사께 오더니, 시비를 거는 것이다. 것이다. 말대꾸를 안 하니까 이 사람이 김익두 목사님을 장작 패듯이 그냥 패는 것이다. 이때 김익두 목사님은 한마디 말없이 다 맞았다. 힘이 없어서 맞는 거야 어쩔 수 없겠지만 주먹이 있는 사람이 말없이 맞는다는 것이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때 목사님이 묻기를 "형님 다 때렸소? “그랬더니, 이 사람이 "다 때렸다 왜?" 하고, 또 때리려고 했다. 그 때 김익두 목사님이 정색을 하고, 그 사람에게 이야기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그랬더니 이 사람이 눈이 휘둥그래지는 것이었다. "내가 김익두라는 사람이요."그랬더니 이 사람이 김익두라는 말을 듣더니, 얼굴 안색이 변하여 그냥 초죽음이 되는 것이었다. 이때 김익두 목사님이 하는 말이, "내가 예수 믿기 전이라면 당신 오늘 장례식 날이라고, 내가 예수 믿은 덕에 당신이 오늘 산 줄을 알라"고 했더니, 이 사람이 그냥 머리를 땅에다 대고 "형님, 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무얼 어떻게 해, 따라와. " 그래서 자기 부흥회 하는데 데리고 가서 자리에 앉혔다고 한다. 이 사람 나중에 예수 믿고 훌륭한 장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길선주 목사께서 말씀을 통해 영적 각성과 성령의 은혜를 주도한 한국의 바울이라면, 김익두는 이적과 치유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 한 한국의 베드로였다. 그는 어느 날인가 장에 나갔다가 서양 여자가 전도하며 전해준 전도지 사건을 계기로 회심하게 되었다.전도지를 받은 김익두는 '뭐 나더러 양 귀신을 믿으라고' 하며 전도지로 코를 풀어 길바닥에 팽개치고 말았다. 그러자 그 여자는 "청년 전도지로 코를 풀면 코가 썩어요"하는 것이었다. 그 후 그는 '어느 모로 보나 자기보다 개화되어 있는 서양 여자가 멀리 이국 땅에 와서 저러는 것을 보면 무언가 있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때 친구인 박태후의 전도를 받아 교회엘 나가게 된 것이다. 그는 순 한문 신약성서를 100번 읽으며 신앙에 심취했고 그 과정에서 가슴을 칼로 찢는 것 같은 불세례를 경험하게 되었다. 체험을 하였고 하늘에서 "김익두야! 김익두야!"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임을 깨달았고 하염없이 울며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 그의 사역에서는 특히 치병의 역사가 많이 나타났는데 심지어 임택권 목사는 '이적증명회'를 만들어 김익두 목사의 집회 현장에서 이적이 일어나는 장면을 기록하고 사진을 찍어 그것을 증명했는데 약 일만 명 가량 치병자를 추측하고 있다. 거지 행각을 하며 살던 박수진이란 자가 있었다. 10년 전 사고로 아래턱이 떨어져 음식도 누워서 먹던 자였다. 김익두 목사는 그를 불쌍히 여겨 금식하며 기도했는데 박수진의 아래턱이 올라가 붙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에 감격한 박수진이 온 동네를 뛰어 다니며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여 온 동네가 놀라게 되었다. 그의 신유의 역사는 이후 계속 되었고 곱사등이 소녀가 펴지기도 하고 소경이 눈을 뜨는 역사가 계속 되었는데, 이런 사건들을 동아일보 58호에서는 '김익두의 이적'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런 김익두목사의 신유의 사역은 병자 자신의 회개와 간구가 함께 역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요 순결한 삶으로 요구되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구 집회에서 김경애라는 기생이 1년 남짓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김익두목사의 간절한 기도와 자신의 간절한 회개로 고침을 받았다. 그러나 후에 다시 기생의 생활로 돌아가는 바람에 병이 재발하고 말았다. 또 안악군 동문면에 최석황이라는 자는 30년이나 고생하던 종기를 치료받았는데 후에 타락하여 병이재발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이 응한 사건이었다. . 그는 또한 철저히 성경을 읽고, 성경대로 믿는 생활을 몸소 실천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이적의 사역자로 삼으신 것은 이런 믿음의 그릇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일만여명이였고, 그의 감화로 목사가 된 사람이 200여명이 있는데 그 중에 이성봉, 주기철, 김재준 등 한국교회사에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이 많이 있다. 광복 후 목회를 계속 할 수 있었지만 한국동란 때 교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다 공산당에 의해 교인들과 함께 살해당하여 순교의 길을 간다. 그 날이 1950년 10월 14일이었다.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눈물로 기도한 주의 종이 있었다.
776번의 부흥집회 인도, 2만 8000회의 설교를 했던 대부흥사
오직 성령의 은혜, 불같은 믿음이었다
김익두 목사는 1874년, 황해도 안악군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족한 것 없는 가정에 외동아들로 태어난 그는
올곧은 성품을 지닌 부모님 슬하에서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아버지의 바람으로 주경야독으로 한문을 깨우쳤던 어린 김익두.
그는 6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길에 오르는데,
그의 오랜 노력의 답은 불합격이었다.
낙방한 김익두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 시련은 아버지의 죽음.
그것은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전환점이 된다.
이생의 번뇌로 그는 영원한 것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아버지의 무덤을 찾는 일은 어느새 그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김익두의 행패가 날이 갈수록 극심해지자
도저히 마음 놓고 살 수가 없다는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해지는데,
급기야 경찰이 나서게 된다.
"왜 당신이 여기 먼저 올라 왔느냐?" 말 같지 않은 소리로써 자꾸 시비를 거는
얼마동안 때리더니, 이 사람이 그 때리던 것을 멈추었다.
그가 삼일 간 금식을 하고 산에서 내려 올 때 큰 불덩어리가 가슴에 떨어져 화끈거리는
그의 최초의 이적은 1919년 12월 25일 달성군 현풍읍내 현풍교회에서였다.
그는 150여 곳에 교회를 세웠고, 설교횟수 이만팔천번, 결신자 28만명, 치병자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사경에 이르도록 고문을 당했고, 목사직을 박탈당했다.
김익두 목사는 초기 한국교회의 부흥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었는데, 이적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 하므로 환란과 핍박 가운데 고통 하는 이 민족에게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게 하였다.그리고 수많은 부흥 집회를 통해 이 땅에 능력으로
복음을 전한 하나님의 종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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