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歷史

나폴레옹과 퐁텐블로 궁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36일 간의 프랑스 여행

天上 2017. 2. 18. 19:55
나폴레옹과 퐁텐블로 궁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36일 간의 프랑스 여행


베즐레를 떠나 북쪽으로 다시 올라간다.

북으로 오니 날씨가 제법 서늘해진다.

포도밭이 많던 남쪽과는 풍경도 사뭇 달라진다.

낮은 구릉지에 밀밭이 넓게 펼쳐지는 곳이 많다.

이제 프랑스에 온지 4주가 되니 한 달 전에 한창이었던

유채꽃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운전하면서 보이는 풍경은 아름다운데 사진을 찍을 수도 없다.

그냥 지나치기가 아까워서 가다가 한 군데 차를 세워본다.



퐁텐블로.

내비가 인도해주는 대로 도착했다.

퐁텐블로궁에서 가까운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오니

비가 제법 세차게 쏟아진다.

식당을 찾았다.

식당 앞의 그리 크지 않은 우편전화국도 품위가 있다.



진짜 어쩌다가 아내가 음식 사진을 찍었다.

딱 두 커트...

오랜만에 먹는 밥이라 사진을 찍은 것으로 기억된다.



바로 이 식당...

식사를 하는 동안 빗줄기는 그런대로 가늘어져 있었다.


식당에서 길을 건너니 퐁텐블로로 들어가는 옆 문이 있다.

조그만 정원을 지나 넓은 궁전 앞뜰인

명예의 뜰(Cours d'Honneur)로 나온다.


1814년 4월 20일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귀양가기 전

이곳에서 옛 부하들에게 작별연설을 했다고 해서

이별의 뜰(Cours d'Adieux)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말발굽형의 계단.

바로 이곳은 나폴레옹의 몰락의 상징이다.

아니, 몰락은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승리가, 성공이 일상화됨에 따라 생긴 교만과 도취가

냉정을 잃게 만들었고 무리한 러시아 원정을 하게 만들었다.

지피지기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전쟁은

절대로 백전불태가  되지 않는 법이다.

오만과 방심의 산물인 러시아 원정은 결국은 나폴레옹을

몰락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것이다.

가는 비가 내리는 퐁텐블로 성의 '명예의 뜰'.

크고 화려한 궁전 건물이지만 쓸쓸한 느낌이었다.

'이별의 뜰'로 바뀌어 불리는 이름 때문일까?

저기에서 얼마 되지 않는 늙은 근위병들에게

엘바섬 귀양을 앞둔 나폴레옹은 뭐라고 이야기했을까? 





표를 사서 궁 내부로 들어오니 전체 모습을 파악할 수 있도록

모형이 놓여 있다.


베르사이유 궁이 건축되기 전에는 프랑스에서 가장 크고

화려했다는 퐁텐블로 궁전.

1981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퐁텐블로 궁에 대해서 최초로 언급된 것은

루이 7세가 즉위했던  1137년의 일이다. 

1167년프랑스에 추방되었던 잉글랜드의 대주교

토마스 베케트에 의해 궁전의 예배당이 헌당되었다.

필립4세는 이곳에서 나고 죽었고 샤를7세(1422~1461 재위)

시대에 확장공사가 시작되었다.

루아르강의 고성을 방문했을 때 빠지지 않았던 인물인

프랑수아 1세 시대에 퐁텐블로성은 일대 전기를 맞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프랑스로 초청했던,

그리고 그의 임종을 지켰던 프랑수아 1세 시대에 

퐁텐블로궁은 대대적인 확장에 들어갔고

르네상스양식을 대폭 도입한다.

1539년에 프랑수아 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알 5세를

이곳으로 초대하기도 한다.

프랑수아 1세의 아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대로 

창술 토너먼트에서 신하의 창에 찔려 죽은 앙리 2세의 왕비였던

카트린느 드 메디치는 자녀 여섯 명을 이곳에서 낳았다.

카톨릭과 위그노의 갈등이 한창이던 앙리 4세의 재위시절

    1600년에는 양 진영이 이곳에 모여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삼총사'에서 등장하는 프랑스 왕인 루이13세가

이곳에서 태어났으며(1601),

태양왕 루이14세는  앙리4세가 선포했던 낭트칙령(신교도 인정)을

철폐하는 퐁텐블로칙령을 1685년 이곳에서 서명한다.

러시아의 표트르대제와 다른 나라의 국왕들도

이 궁전을 방문한 적도 많을 정도로

 당시 유럽세계의 중심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 곳이다.

루이 15세의 결혼식도 이곳 퐁텐블로 궁의

삼위일체 예배실(Chapelle de la Trinité)에서 거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국왕과 귀족들의 방문에 맞추어

몰리에르를 비롯한 많은 극작가들의 작품도

이곳에서 실제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프랑스혁명기간 동안 퐁텐블로 궁의 건물 

자체는 큰 손상을 입지 않았으나

 많은 유물들과 가구들이 유출되고 경매로 처분되었다.

나폴레옹 시대에 와서 퐁텐블로는 대대적으로 복구된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코르시카섬출신의 시골뜨기 초급장교가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서 황제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나,

황제가 된 이후의 그의 삶을 보나

그는 항상  세계사 상 격동의 중심에서

온갖 풍상을 겪었던 세월을 보냈다.

작은 영웅.

비록 황제가 됨으로써 베토벤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작곡해내었던

영웅교향곡을 내던지게 했던 그이지만

그는 여전히 프랑스국민들에게는 영웅으로 남아 있다.

마지막 워털루 전투의 패전으로 다시 귀양 보내어진

대서양의 절해고도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생을 마치긴 했지만

나중에 파리에서 본 앵발리드의 그의 묘를 보면

프랑스인들의 가슴 속에 그는 아직도 살아서

후손들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있다.


1799년 쿠데타로 통령이 된 나폴레옹이 퐁텐블로를 

처음 찾은 것은 황제가 되기 1년 전인 1803년이다. 

두 번째 방문인 1804년 6월 나폴레옹은

건축가 피에르 프랑수아 레오나르 퐁텐느를 대동하고

퐁텐블로 궁을 새롭게 꾸미도록 지시한다.

이전의 왕들의 침실은 황제의 옥좌의 방으로 바꾸고

가구도 황제와 황후의 거처에 걸맞게 바꾼다.

1804년 12월 2일에 파리의 노트르담성당에서 거행되는

나폴레옹의 황제대관식에 참석차

프랑스로 온 교황 비오(피우스)7세를 마중하기 위하여

황후가 될 조세핀과 함께 세번 째로 방문한다.

직접 전쟁터를 누볐던 까닭인지

황제로서 나폴레옹의 방문은 그리 자주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1812년 부터 나폴레옹이 전쟁의 패배로 인해서 퇴위한 1814년 까지

교황 비오 7세는 이 궁전에 연금되기도 한다.

러시아 원정 실패 후 연합군에 의해서 파리가 함락되자

나폴레옹은 이곳 퐁텐블로 궁으로 피신하고

한 차례의 자살 미수 끝에 퇴위하게 된다.

1814년 4월의 일이다.

그가 퐁텐블로에 마지막으로 발을 디딘 것은

11개월 후인 1815년 3월20일의 일이다.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가기 전

 이 곳에서 약 두시간을 머물렀다.

나폴레옹은 비록 이 궁에 머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지만

마지막 귀양 장소인 세인트 헬레나에서

퐁텐블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두고 있다고 한다.

'몇 세기를 걸쳐서 살  진정한 왕의 처소다.

건축학적으로 철저하게 지어진 건물은 아니더라도

 잘 계획되고 완벽해서 거처하기에 적당한 궁전이다.

유럽에서 가장 안락하고 좋은 곳에 위치한 궁전이다' 


궁전의 내부는 내가 돌아본 순서대로 올려본다

우리가 가장 먼저 들어간 곳은 나폴레옹 1세 박물관이다.


나폴레옹 1세 박물관의 나폴레옹 초상화. 




레지옹 도뇌르 훈장(Legion d'Honneur).

1802년 나폴레옹이 제정한 프랑스 최고 훈장이다.


제1통령(콘술)당시의 나폴레옹의 검.

신성한 에뻬(Epée du Sacre)라고 되어 있다.


첫째 부인이자 황후가 된 조세핀.



시계. 그런데 저 시대에 이미 롤렉스가 있었나보다.

오른쪽의 작은 초록색 팻말에 ROLEX라고 되어 있다.



황제의 테이블...



나폴레옹에 의해서 1812년 6월부터 1814년 1월까지

이곳에 연금되었던 교황 비오 7세...


평생 전장을 누볐던 나폴레옹은 자신의 침소를

야전군의 천막처럼 꾸며 놓고 있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1810년 조세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는다.

이듬해에 낳은 아들을 '로마왕'으로 칭한다.


아래 사진이 나폴레옹과 마리 루이즈 황후,

그리고 아들 '로마왕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 1세 박물관 복도에는 나폴레옹의 가족들의

초상화와 흉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나폴레옹의 흉상...


나폴레옹의 모친


모친의 흉상...


나폴레옹은 8남매 중의 둘째로 태어났다.

첫째, 나폴레옹의 형 조셉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동생에 의해 시실리의 왕 주제프 1세(1806~1808)로,

에스파니아 국왕 호세 1세(1808~1813)로 봉해졌다.


조셉의 부인 에스파니아 왕비 마리 쥴리 클라리와 자녀.


둘째, 황제 나폴레옹

나폴레옹 시대의 업적 중의 하나이자

세계 3대 법전 중의 하나인 나폴레옹법전과 함께 ... 


마리 루이즈 황후



셋째, 루시앵 보나파르트


넷째, 엘리사 보나파르트




엘리사의 남편 펠릭스 바시오치.


다섯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네델란드 왕(1806~1810)

나폴레옹의 동생. 나폴레옹 3세의 부친이다.



여섯째, 폴린 보나파르트.



일곱째, 카롤린 보나파르트



카롤린의 남편 조아생 뮈라(Joachim Murat).



여덟 째, 제롬 보나파르트 베스트팔렌 왕(1807~1813)



제롬의 부인. 베스트팔렌 왕비  카트린느 드 뷔르템부르크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200년 전에 이미 과거가 되었다.

그러나 나의 나폴레옹 여행은 아직 남아 있다.

며칠 후 파리에서 그를 다시 만난다.

개선문에도 올랐고 앵발리드의 그의 묘도 봤다..

또 운 좋게도 군사박물관의 특별 전시에서 

 그의 인생의 마지막 여정이었던

세인트 헬레나에서의 그를 보았다.

그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다시 퐁텐블로의

이곳 저곳을 보기로 한다


 

 

파빌리언



http://cafe.daum.net/musicgarden/5dNt/6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