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대로 다 퍼주는… 노숙형제들의 대부 |
서영남 민들레국수집 주인장(60)은 참 선하게 생겼다. 둥글둥글 착한 물기가 뚝뚝 흐른다. 눈과 입꼬리는 늘 웃고 있다. ‘사랑의 에너지’가 철철 넘친다. 그는 12월 1일 필리핀 빈민가에서 돌아왔다. 4월에 갔다가 ‘필리핀민들레국수집’을 뚝딱 만들어 놓고 왔다. 그의 빈자리는 딸 모니카(서희·30)가 곧바로 날아가 채웠다. 내년 1월엔 그가 다시 간다. 서영남은 대한민국 으뜸 마음부자다. 그의 문어발식 ‘퍼주기 사업’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장되고 있다. 문제는 죄다 쓰기만 한다는 것. 그래도 그는 정부지원을 일절 받지 않는다. 후원회나 자원봉사자 조직 같은 것도 없다. 조직은 결국엔 배타적이 된다. 그게 싫다. 무슨 프로그램 공모에도 관심이 없다. 그는 천하태평이다. 2003년 문을 연 인천 화수동 민들레국수집(무료)은 하루 400∼500명의 배고픈 형제들이 찾는다. 쌀만 하루 80∼100kg씩 동이 난다. 노숙형제들이 몸을 씻고 책도 읽고 상담도 하는 민들레희망지원센터는 이제 회원이 2800여 명에 이른다. 노숙형제들에게 두툼한 겨울잠바나 신발을 무료로 챙겨주는 민들레가게도 잘되고 있다. 노숙형제들에게 단칸방을 얻어줘 자립을 돕는 일도 계속하고 있고, 민들레진료소도 하루 100여 명의 가난한 이웃들을 무료로 진료한다. 지난해엔 밥 굶는 노인들을 위해 ‘어르신민들레국수집’을 열었다. 포스코 청암상금 2억 원을 받아 1억 원을 이곳에 썼다. 나머지는 필리핀민들레국수집 만드는 데 들어갔다. “하루하루가 아슬아슬하지만 단 한 번도 쌀이 떨어진 적 없다. 하느님이 늘 채워 주신다. 노숙형제들은 마음이 여리다. 식판에 계란프라이 1개만 더 얹어줘도 어쩔 줄 모른다. 행복해한다. 겨울옷가지도 좀더 가져가라 해도 꼭 필요한 만큼만 챙긴다. 노숙하는 데 가장 귀찮은 게 짐이라며. 아닌 게 아니라 노숙초보들의 짐이 유독 많다. 난 가장 편한 선택을 했다. 아래로 내려가는 것만큼 쉬운 게 어디 있는가. 가난하고 약한 분들은 조금만 도와드려도 펄떡펄떡 뛰어오른다. 예수님처럼 살기, 자유롭게 살기, 이웃사랑하며 살기가 내 꿈이다. 난 성경말씀 중에 ‘어미 품에 안긴 아기처럼’이란 구절이 가장 좋다. ‘하느님 품에 안긴 젖먹이처럼’ 사는 게 행복하다. 국숫집하면 돈벼락 맞을 일도 없고, 흔들릴 일도 없다.” 사실 그의 민들레국수집 메뉴엔 국수가 없다. 처음엔 국수로 시작했지만 노숙형제들은 밥을 원했다. 국수는 배가 쉽게 꺼지기 때문이다. 식당은 4인용 탁자 6개 규모로 아담하다. 뷔페식으로 밥, 국에 반찬이 예닐곱 가지나 된다. 커피와 과일후식도 있다. 식당 밖의 손잡이엔 ‘(찾아주셔서)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식당 안에도 ‘당신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 ‘바라만 보아도 좋은 사람아’ ‘평화가 너희와 함께’ 같은 글귀가 걸려 있다. 배고픈 사람은 누구나 하루에 몇 번이고 와서 먹을 수 있다. ‘고맙다’는 말이 곧 밥값이다. 남기지만 않으면 된다. 계산대도 가격표도 종업원도 없다. 멀리 수원 천안 평택이나 서울 노숙형제들도 많이 찾는다. 주방엔 그날그날 봉사자들이 조용히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한다. “밥 한 그릇보다 사람대접이 훨씬 소중하다. 마음과 머리도 배부르게 해줘야 한다. 봉사는 평등하다. 베푼다는 말에는 ‘동정’의 뜻이 들어있다. 내가 쓰고 남은 것을 주는 느낌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사랑이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세상의 어느 엄마가 자식에게 밥 해주고 생색내는가. 건방 떨면 안 된다. 우리 식당엔 선착순이나 줄서는 게 없다. 늦게 오셨더라도 가장 배고프고 힘든 분 먼저 드시는 게 원칙이다. 그분들은 품위 있게 밥 먹을 권리가 있다. 노숙형제들은 대부분 경쟁사회에서 밀려난 분들이다. 가족이나 친구까지 모두 버렸다. 마음이 황폐해졌다. 10년 함께 노숙하면서 옆 사람 이름도 모른다. 이분들에게 이웃을 찾아주고 사랑을 알게 해줘야 한다. 반갑게 인사해주고, 이름 불러주고, 섬겨줘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 스스로 변한다. 잔소리는 독약이다. 예수님이 어디 잔소리하는 거 봤는가.” 서영남은 1954년 부산 범내골 판자촌에서 태어났다. 7남매(4남 3녀) 중 다섯째, 아들로는 셋째. 신의주 용천이 고향인 아버지는 열차사고로 돌아가셨다. 그가 초등학교 1학년, 막내가 갓 돌을 지났을 때였다. 어머니(94)가 삯바느질로 자식들을 키웠다. 어릴 적 잠결의 어머니 재봉틀 소리는 그에게 자장가처럼 아늑했다. 어머니는 신의주 비현성당을 다녔을 정도로 신앙이 독실했다. 1976년 서영남이 수도원에 들어가겠다고 하자 춤을 추며 기뻐하셨다. “난 형제 중에서 가장 못됐다. 어머니는 그런 나에게 늘 ‘착하게 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살려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런데 갈수록 편해지기만 했다. 언젠가부터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사다리 타고 위로만 올라가는데, 난 ‘사다리 타고 밑바닥까지 내려가고’ 싶었다. 꼴찌들이 먼저 대접받는 세상, 가난한 사람들이 우선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결코 조직이나 단체에 함몰돼 내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난 결심했다. 앞으로 절대 넥타이 매지 않겠다고. 무엇이든 남과 경쟁하지 않겠다고. 죽어도 폼 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25년 동안 정들었던 수도원을 나왔다. 2011년 청와대에서 훈장(석류장)을 받을 때도 ‘넥타이 매고 오라면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괜찮다고 하더라. 내가 손해 보겠다고 생각하면 이 세상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다.” 서영남은 장애인이다. 어릴 적 크게 다쳐 오른손을 잘 못 쓴다. 한때 열등감에 시달렸다. 부끄러워 숨기려고 애썼다. 이도 틀니다. 1988년 필리핀 파견생활 중 마지막 남은 하나를 뽑았다. 허리도 부실하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을 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긴다. 이 덕분에 몸이 불편한 노숙형제들이나 이가 없는 어르신들의 심정을 알게 됐다. 그는 수도원에서 환속한 사람이다.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어느 성당 강연을 가서 제대(祭臺)에 서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 가톨릭 경향잡지(1906년 창간)에 자신의 얼굴이 표지에 나왔다. 깜짝 놀랐다. 환속 수사로선 강기갑 전 국회의원에 이어 두 번째였다. 그는 ‘홀로아리랑’을 즐겨 흥얼거린다. 그냥 좋다. 담배는 7년 전에 끊었다. 술은 가끔 조금씩 아내와 홀짝거린다. “힘든 적 없었느냐고?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짜증난 적도 없었다. 난 지상에서 천국처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낮은 곳이 있으면 내려가고 싶다. 노숙형제나 교도소형제는 관리대상이 아니다. 기다려주고 참아주면 언젠간 스스로 변한다.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걸 알면 마음이 스르르 열린다. 처음엔 혼자 살게 내버려두고 존중해주면 된다. 기를 꺾으면 안 된다. 수도원같이 그 좋은 곳에서 살아도 안 변하는 사람이 있다. 오래 기다려줘야 한다. 김남주 시인의 ‘사랑’이란 노래처럼.” ‘사랑만이/겨울을 이기고/봄을 기다릴 줄 안다//사랑만이/불모의 땅을 갈아엎고/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줄 안다//천년을 두고/봄의 언덕에/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사랑만이//인간의 사랑만이/사과 하나 둘로 쪼개/나눠 가질 줄 안다.’ |
'文化 > 人間勝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사랑을 후회하고 후회했다 (0) | 2018.03.18 |
---|---|
"탄핵은 하늘의 섭리인가" (0) | 2018.03.15 |
양비론 비판에 대한 비판 (0) | 2018.03.10 |
제로의 법칙 (0) | 2018.03.10 |
'창조경제'를 한다면서 '말 타는 처녀'나 후원했다. (0) | 2018.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