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관상기도

관상기도-네이버 지식백과

天上 2020. 10. 24. 20:08

관상기도

[ 觀想祈禱 , contemplation음성듣기 ]

'관상'이란 '함께'라는 뜻의 'con'과 이교성소, 혹은 후대의 기독교 성소를 뜻하는 'templum'의 합성어로서 '사물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장소인 성소에서 사물들의 근원하나님을 발견하고 바라보는 것'이라는 뜻을 지녔다. 그리스 교부들 중에 일부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직접적 경험을 '떼오로기아'(Theologia)라고 했다고 한다.

오늘날 관상기도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말로 하는 기도는 깊이 있는 기도가 아니다"(Thomas Keating)라면서 "우연적인 실체들 안에서 모든 실체의 근거이며, 참된 실체이신 하나님을 보는 것"(Thomas Merton)을 관상기도라 한다. 그래서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관상기도는 언어나 심지어 마음속의 심상들(images)도 사용하지 않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지향하는 기도라는 말을 한다. 즉, '관상기도'는 주 앞에서 이미지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마음으로 주님을 지향하는 기도이다. 곧, 침묵 가운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품안에서 쉬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관상기도는 결국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다. 심지어 의식 너머의 상태에 이르고 거기 머무르는 것을 지향한다.

이런 점에서 관상기도를 말하는 상당수 지도자들은 신비주의 및 천주교의 전통과 동양 종교들의 수행법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곤 한다. 그들은 생각과 의식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어떤 종교적 명제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도 넘어서야 한다고(무념무상의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고) 본다. 그들은 다음의 성경구절을 근거로 제시하곤 한다(시19:14; 46:10; 116:9; 145:5; 마5:8; 계1:7; 3:20 등).

그러나 위의 성경 내용들은 관상기도 주장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상'에 대입시키기에는 부적합하다. 문맥과 원문 분석을 해 보면 성경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문맥해석이 아니라 합리화를 위한 주관적 해석에 불과하다.

구약 시대 하나님의 임재 방식은 선지자가 원하여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고 갑자기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임하셨다. 즉, 하나님 주도적인 말씀이 임하신 것이지 사람이 분위기를 만들어놓고 기다려서 듣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고요와 침묵을 지향함으로써 이를 통해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고자 하는 관상기도는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도움이 합하여 '정화', '주입', '합일'의 단계로 나아가려는 반펠라기우스적인 천주교적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본다.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기도는 그리스도십자가 구속에만 의존하여 성령님의 감화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결국, 관상기도는 종교혼합주의, 신비주의, 인본주의, 들숨과 날숨의 호흡기도로 개인 및 집단 최면술이 포함된 자기 확신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임재를 제한하는 것이다. 참고로, 관상기도 주장자들은 '관상'이라는 용어가 주는 거부감을 해소하기 위해 '관상'이라는 용어를 숨기고 '영성기도', '침묵기도', '묵상기도', '마음기도', '향심기도', '경청기도', '호흡(숨)기도' 등 다양한 말로 위장하고 있다(이승구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관상기도 [觀想祈禱, contemplation] (교회용어사전 : 예배 및 예식, 2013. 9. 16., 가스펠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