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뜸醫學/침뜸醫學

음양(陰陽)이란 것은 과연 무엇인가?

天上 2015. 7. 11. 09:24

 

 

음양(陰陽)이란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음양이란 것이

처음 출발 단계에서는

해 길이의 길어짐과 짧아짐을 의미하던

말이었다고 여겨진다.

 

옛 책에

음양은 소식이다” 라는 말이 있다.

소식(消息)이란 말은

원 뜻이 줄어들다, 소멸한다는 의미의

소(消)자와

늘어나거나 자란다는 의미의

식(息)이 결합된 말이다.

 

늘어나고 줄어든다는 뜻이고,

바로

해 길이의 변화를 뜻하는 말이다.

소식은

나중에 변화라는 의미가 강조되면서

‘news' 라는 말로 우리는 쓰고 있다

(새 소식인즉 새 변화이기 때문이다).

 

음양은 소식이고,

결국

해 길이의 변화를 뜻하는 말이었다.

해의 길이가 변하는 이유는

태양을 도는 지구라는 행성이

축에서 23.5 도 기울어 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해 길이의 변화가 나타나고,

계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동시에 낮과 밤 또한

지구의 자전이 만들어내는 현상이며,

이 또한 음양이다.


해 길이는

동지(冬至)에 가서 가장 짧고,

그 이후 점점 길어지면서

하지(夏至)에

도달하면 다시 짧아지기 시작한다.

 

그것이

봄이고 여름이며, 가을이고 겨울이다.

이 같은

사 계절의 순환과 더불어

낮과 밤의 순환이라는 이 우주적 박자는

지구의

공전과 자전이 만들어내는 리듬으로서

지구상에 사는

모든 생명체 내부의 리듬도

여기에 맞춰지고 조율된다.

낮과 밤, 계절의 변화!

이 순환과 박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내부 리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 현상의 동력원(動力源)이다.

아울러서

달과 지구의 관계 또한

자연 현상과 생명체의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래서

태양은 양이고 달은 음인 것이다.

 

당연히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이 순환과 리듬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맞추어 생활한다.

우리의 영혼과 인식 작용은

비교적 자연의 순환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이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봄에

우리의 마음은 약동하고,

가을에는

지난 일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인류 문명이

계절의 변화가 비교적 뚜렷한

온대 지역에서

발전의 정도가 높았던 것은

결국 우연이 아니다.

이 또한

음양과 소식, 태양과 달이 만들어내는

순환의 영향을 받는다.

음양과 오행은

이처럼 자연의 순환, 태양과 달,

그리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만들어내는

리듬을 말하는 것이지만,

아울러서

우리 인간이

우주와 자연을 인식하고

파악하는 방법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리가 자연과 우주를 대할 때,

자연과 우주는

 그 스스로 자연이고 우주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것들이

생긴 모습 그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방법을 통해

자연과 우주를 인지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사물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물을 두 가지 대립되는

측면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령

우리 눈앞에

처음 보는 어떤 물체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그것이 큰가 작은가(大小),

무거운 가 가벼운가(輕重),

긴가 짧은가(長短),

밝은 색인가 어두운 색인가(明暗) 등등

상호 대립되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 물체를 파악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그 사물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데,

알고 보면

그것이 바로 음양(陰陽)이며,

서구의 이원론(二元論)적

우주론의 바탕을 이루는 소박한 인식 과정이다.

 

이처럼

출발 과정은 동일하다.

사물을 두 가지 대립되는

측면에서 파악해 들어가는 방식은

인류 보편의 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음양 사상은

서구의 이원론과는

나중에 가면 많이 달라진다.

 

이원론은 두 가지 요소가

고정 불변임을 가정하는 것이지만,

음양 사상은

두 가지 요소가

상대적인 것임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음양 사상, 또는 음양관(陰陽觀)은

사람이라는 존재를 분류할 때,

남자를 양(陽)으로 보고

여자를 음(陰)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그것은 여자에 비해

남자가 양이라는 것이지

남자 자체를

고정된 양으로 인식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남자가 양이고 여자가 음이라는 것

또한

남성 우위의

사회구조를 반영하고 있을 뿐이지,

절대적인

음양 구분은 아닌 것이다.

음양은

그 자체가 절대성을 주장하고 있지 않다.

동시에

어른은 아이에 비해 양이고,

아이는 음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다른 동물을 전제할 때, 양이며

동물은 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물 전체는

식물에 비해 양이 되고

식물은 음이 되는 것이지,

동물 스스로를 양이라 할 순 없는 것이다.


음양관은

어디까지나 무엇에 비해,

상대적인 관점에서 음양을 정하는 것이다.

요는 음양이

고정 불변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고,

그렇기에

그것을 추상적으로 음양이라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이원론(Dualism)은 사물을 이루는

궁극적인 두 가지 요소를 결정짓는 것이다.

 

세상은 선과 악,

낮과 밤,

불과 물 등등,

보는 이에 따라 두 가지 요소가

이 세상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음양관은 사물의 대극되는

두 가지 측면을 말하는 것임에 반해,

이원론은 두 가지 요소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음양관과 이원론은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두 가지 대립되는 측면에서

사물을 받아들이는 출발점은 같았으나,

그것의

상대성에 착안하는 음양관과

두 가지 요소가

고정적임을 강조하는 이원론은

나중에 가서

전혀 다른 인식 체계와 사상,

철학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음양은

상대적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양은 음이란 것이 느껴질 때,

양이 성립하는 것이고,

음은 양이란 것이 인지될 때

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음이 없이 양은 없는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음양은 상대성(相對性)을 전제로 한다.

반면

서구의 이원론은 대표적인 두 요소가

고정불변임을 전제로 한다.

이는

서구 철학의 시원이 되는

그리스 철학이 근본적으로

‘thing'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물에 대한 명증성(明證性)을 중시했는데,

이는 지중해의 풍부한

태양광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눈부신 태양 아래에서 사물은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대비가 강조되면서

명확하게 스스로를 나타내 보인다.

거기에

사물이 명확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Thing is clear there!).

 

 

 

따라서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야말로 서구 사상에 있어

가장 서구적인 색채를 덧입혀준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 기반을 제공한다.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그리스 철학의 양대 갈래인

엘레아 학파의 창시자로 

고대 그리스 철학의 주요 인물일 뿐 아니라,

사실은

서양 철학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두 가지 주장을 했다.

하나는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지,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에서 유가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인간의 인식이나 감각 작용은 헛된 것이어서,

마치

무에서 유가 생길 수 있다는

잘못과 오류를 범하며,

그 오류에서 벗어나려면 사변적 이성(reason),

즉 논리에 의지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이는 바로

논리의 명증성과 정합성을 강조하는

서구 철학과 논리학의 출발점이다.



또 하나의

고대 그리스 철학인 자연철학,

자연과 우주에 대한 생각과 주장으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 밀레토스 학파는 

탈레스라는 사람이 창시자이다.

 

그는 이집트에 유학하여

바빌로니아의 수학과 천문학을 배웠다.

일식(日蝕)을 예측하기도 했었으며,

이집트의 경험적ㆍ실용적 지식을 바탕으로

논리에 바탕한

기하학을 확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원은

지름에 의해서 2등분된다,

2등변삼각형의 두 밑각의 크기는 같다,

두 직선이 교차할 때

그 맞꼭지각의 크기는 같다는 등의

정리(定理)는 그의 창안이다.

 

그는

우주와 만물의 구성에 대한 탐구를

고대 그리스에 전파한 사람이었다.

만물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하는

생각과 탐구는

원래

인도와 바빌로니아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들은

그전에 존재하던 우주에 대한

신화적인 설명에서 탈피하여

만물을 자연 그대로 관찰하고,

그것이

움직이고 변하는 이치의 보편적 원리를

인간의 이성에 부합되는 방향,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했었던 사람들이다.

 

이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양대 갈래는

플라톤에 와서 이원론으로 집대성되는데,

이는 필연적인 흐름이다.

 


 

플라톤의 이원론은

이 세계를 가상의 세계인 현상계와

참된 실제의 세계인 이데아라는

두 개의 카테고리로 나눈다.

 

변화하는 현상계는

경험적 현실세계이자 감각세계이지만,

이데아의 세계는

영원불변의 세계이며 초월적 실제계,

초감각의 세계이다.

 

현상계는

존재의 개별성이 강조되고,

이데아는

보편성을 가진다. .

그 후의 서구 철학은

눈앞에 보이는 헛것이 아니라,

‘진짜(real thing)’는 존재하며,

그 진짜를 탐구하는 방법은 어디까지나

가장 믿을만한 ‘이성(reason)',

 

논리를 통하는 방법만이 ’길‘이라는

서구인 고유의 방식에 의해 전개되어졌다.

그에 따라

진짜를 찾으려는 노력은

실로 다양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진짜는

물질밖에 없다는 유물론이 그것이며,

이데아와 감각세계를 구분하여

신의 존재를

이데아의 견지에서 설명하는

주장하는 신학(神學)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중 가장 강력한

경쟁력-이성에 호소하는 힘에 있어-을

가진 주장은

바로

오늘날 원소의 결합으로 물질을 설명하는 화학과

원소의 에너지로 운동을 설명하는 물리학이었다.

바로

현대 과학이 그것이다.

그런 면에서

서구의 과학은 대단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초월적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면에서

중세 신학에 대한

대체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과학은

가장 강력하고 업그레이드된 신학인 것이다.

반면

동아시아 세계의 음양관은

요소 내지는

원소(element)의 철학이 아니며,

존재하는 세계의

상대적인 측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음양 오행에서

오행 역시 처음에는 목화토금수 라는

소박한 물질관에서 출발하긴 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서

구체적 물질관을 버리고

음양관의 상대성적인 측면에서

오행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동아시아 문화권은

그 지향하는 바가

궁극적인 ‘진짜’를 추구하는

서구의 방향과는 달랐던 것이다.

 

동시에

이데아의 세계를 동경하지 않았으며,

세상은

그저 눈앞에 존재하는 세상이 전부였고

거기에 충실했던 것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에 있어

서구적인 신(god)의 개념은

한번도 있어본 적이 없다.

이른바

천(天)의 개념도

서구의 신과는 전혀 색깔을 달리한다.

이에 따라 음양관도

만물의 요소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고,

만물의

상대적인 두 측면만을 중시했던 것이다.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초월적 존재에 대한 생각을 대변하는 것은

음양오행이 아니라 신선 사상이다.

 

그러나

신선 역시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에 비해

무척이나 오래 살긴 하지만

그 역시 사멸하는 존재였다.

 

불로장생의 생각은 있었으나,

영생불멸이라는

터무니없는 욕심(?)은 아예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불교가 전파되면서,

존재의 덧없음과

영생불멸을 동시에 알게 되었으니

이 또한

묘한 역설(irony)이라 할 것이다.

 

by/김태규의 명리학 

 

  

 

가져온 곳 : 
카페 >우대받는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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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地坪|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