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uality/聖經硏究

가상칠언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天上 2016. 2. 24. 10:12

가상칠언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본문 :눅 23:39~49,

 

한국전 참전 16개국의 일원으로 약 6천여 명의 군대를 우리나라에 보내준 에티오피아라는 아주 고마운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아프리카의 동부 중심에 위치하면서 현재로서는 세계 최빈국(最貧國)의 하나에 속합니다. 주후 3세기부터 기독교를 신봉하는 나라로서 지금도 전 인구의 약 3분의 2가 기독교인이며 매년 세례식 때면 공동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최고의 명절로서『마스칼』이란 절기가 있는데 이 마스칼이란 말은 에티오피아말로 십자가의 재발견이란 의미를 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의 의미를 발견한 날이라고 해서 온 국민이 큰 명절로 지키는 것이죠.

 

우리의 주위에 기독교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상당히 많이 있으며 또 우리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이 일대만 하더라도 십자가가 아주 즐비합니다. 그 많은 십자가를 볼 때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현상이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십자가가 난무하는 현상이 오히려 불신자의 눈에 덕스럽게 않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십자가의 정신과 의미를 바로 알고 사회를 향하여 그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더 나아가 주님께서 지신 그 십자가와 그리고 그 위에서 외치신 일곱 말씀의 의미를 진정으로 알고 전하는 교회가 얼마나 되겠는지를 저는 종려주일을 앞두고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종려주일을 맞아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재발견하여 주님의 고난에 믿음으로 동참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상칠언(架上七言)을 강론하려 합니다.





제 1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 23:34. 용서의 종교-


옛날 왕정시대(王政時代)에는

돈 많은 사람이나 세도가 당당한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자기가 맞을 매를 종이나 매 품팔이를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신 맞게 하고 그 삯을 주었다는 기록이 간간이 전해집니다. 주로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선비들이 매를 대신 맞아주고 돈푼이나 얻어다가 가족들의 끼니를 이었다고 하는데 당시에 그 죄의 값은 주로 곤장(棍杖)으로서 죄는 자기가 짓고 곤장은 가난하고 낮은 백성들로 맞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는 정 반대로 죄는 미련한 우리가 지었고 그 죄로 인해 우리가 사형에 해당하는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상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보배로운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러 주셨으니 이 얼마나 놀랍고 큰사랑입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신 첫 번째 말씀의 의미는,

 

①원수까지도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제 1언을 보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은 피를 흘리면서 고통을 당하는 중에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고 외치십니다.

그러나 밑에서는 예수님께서 입으셨던 옷을 벗기고는 그 옷을 누가 가질 것인가에 대하여 서로 혈안이 되어 다투는 군병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그 중에 한 군병이 말하기를 속옷은 통으로 된 것이니 나누지 말고 제비를 뽑아 갖자고 제안을 하였고 그들은 제비를 뽑아 속옷을 취하고 있습니다(요 19:24).


얼마나 무정한 사람들의
모습입니까? 그러므로 이 용서의 말씀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판결을 내린 빌라도와 허물과, 죄로 얼룩진 당시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님을 부인하였던 베드로와, 은 30에 스승을 판 가룟 유다의 죄까지도 다 용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와 종교 지도자들의 죄를 용서하셨고(요 19:06~23),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의 죄를 용서하셨고(눅 23:34),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마 26:15~69).

 

②우리도 서로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며 지내라는 말씀입니다.

한 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고 물었을 때 주님은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21,22).

 

사도 바울도 골 03:13,14절에서,

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고 가르쳤습니다.

 

①주님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고 가르쳤고(골 03:13),

②주기도문에서 명령하셨고(마 06:12),

③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마 18:21,22).

 

오늘 우리는 제 1언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고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임을 알아 용서하는 일에 걸림돌을 만나지 않도록 넓은 마음을 가집시다.

 

 

제 2언.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23:43. 구원의 종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좌편과 우편에는 각각 한 사람씩 강도가 십자가에 달렸었는데 그들은 큰 죄를 범하여 당시에 최고형인 십자가형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때 달린 행악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비방하여 말하기를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냐? 당신이 정말 그 구원자라면 당신과 우리를 이 자리에서 구원해 보라(눅 23:39)고 비꼬듯 말했습니다.

그때에 한 편 강도는 그 사람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당연한 값을 당하는 것이지만 이 분이 행하시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지 않느냐 하면서 다시 예수님을 향하여 간구하기를,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라고 외치면서 구원을 요청했으며 예수님도 이 말을 받아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두 번째(제 2언) 말씀은 어떠한 의미가 들어있습니까?

 

①예수님은 낙원의 주인이심을 안내해 줍니다.

요 14:02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0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계 22:0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0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낙원의 주인, 영원한 천국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말씀으로서 낙원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서 만드신 에덴동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 낙원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주변에서 마지막에 회개한 한 강도가 들어갔다는 사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비록 큰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이었지만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알고 회개와 구원의 손길을 내 밀어 기도함으로 낙원에 들어가는 놀라운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0:13절 말씀처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날 과거에 어떠한 죄와 허물이 있었다 할지라도 주님을 만나서 그 죄를 회개하고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그 죄에서 용서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게 됩니다.

 

요 0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②장차 우리가 갈 낙원임을 안내해 줍니다.

계 22:0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는 거기서 세세토록 왕노릇 할 것이며,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을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다 이 천국의 본향에 이르도록 믿음으로 승리하는 자가 도어야 합니다.


 


제 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27. 효도의 종교-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을 따라온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눅 23:27절에 보면 또 다른 백성과 및 그를 위해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백성은 구경하려고 따라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언덕을 오르는 몇몇의 여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주님의 고통을 자신들의 아픔처럼 여기고 가슴을 치면서 먼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왔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을 마치자 백성들도 돌아갔고 여인들도 대부분 돌아갔으나 그러나 끝까지 돌아가지 아니하고 남아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요 19:25절에 의하면,

①그 모친 성모 마리아, ②이모(세베대의 아내 살로메) ③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④막달라 마리아 등 4명의 여인이었으며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그 옆에 서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 모친과 사랑하는 제자들이 곁에 선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시니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셨는데 여기서 왜 예수님께서『여자여』라는 말씀을 통해서 존칭어를 쓰지 않았는가 하며 이상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자여 라고 부르는 말이 비하(卑下)하는 칭호 같지만 사실 헬라어에서 이 말은 비하의 의미가 전혀 들어 있지 않는 말입니다.

 

①슬픔을 위로해 주시는 주님입니다.

그러면 왜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여자여 라고 하셨습니까? 아마 예수님께서 슬픔에 가득찬 보통의 모친 마리아에게 어머니! 하고 부르셨다면 그의 마음을 더 격동케 하실 수가 있었을 것이며 마리아의 마음을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 또한 아픔이 한결 솟아났을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엎드려 있는 나다나엘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어느 물고기 뱃속에 돈이 얼마나 들어 있는가를 아시는 주님, 가룟 유다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인데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을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라고 부르심으로 자신이 구속의 주가 되심을 상기시키시고 어머니의 슬픔을 위로하며 자제시키시는 배려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②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임을 일러주시고 계십니다.

우리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이죠. 세상 사람들은 간혹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는 불효막심한 자들이라고 비난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모르는 말씀입니다. 돌아가신 분에게 진수성찬을 차려서 드리고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 아닙니까? 살아 계실 때 잘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처럼 실질적인 효도를 강조하는 종교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십계명 중에 인간에게 주신 가장 첫 번째 계명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하신 말씀입니다(출 20:12). 예수님도 친히 효의 계명을 실천하셨으며 성경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산 교훈을 주십니다.


 


제 4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 고난의 종교-


마 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때가 육시 즉 우리의 시간으로 정오가 될 때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는데 제 구시(오후 3시) 즈음에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를 지르시기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네 번째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①죄의 삯(값)은 사망인 것을 말해 줍니다.

극심한 고통에 달한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고 절규하셨음에도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돌이키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돌아보지 아니하셨습니다.

롬 06:23절 말씀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대속의 제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죄의 대가를 철저히 물으셨고 또한 한 치의 오차도 없고 한 홀의 감함도 없이 처절히 그 죄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대속의 원리를 따라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가 당해야 할 죄와 사망 그리고 질고와 슬픔, 허물과 죄악, 병과 상함을 다 담당하신 것입니다.

 

②죄악의 담을 허무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은 죄악의 담을 허무는 순간으로서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는 순간 마 27:51절에 보면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성소의 휘장이란 무엇입니까? 이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구분하는 휘장으로서 성소 안의 지성소는 일 년 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이 민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거룩한 장소로서 대제사장 외에 누구든지 이 지성소에 들어가면 죽음을 면할 수 없고 설령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잘못된 의식을 행하거나 부정하면 죽음을 당하였던 곳입니다.

이 휘장은 얼마나 튼튼한지 아주 두꺼운 가죽으로 되어 있어서 양쪽에서 소가 끌어당긴다 해도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매우 튼튼하게 되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는 순간 이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찢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찢어질 수 없는 일로서 이는 곧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완전히 허물어 버린 놀라운 역사의 한 상징이었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지성소 안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또한 들어가도 되었으며 아무도 죽음을 당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제사장을 통해서만 속죄하던 구약시대는 지나가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기도할 수 있게 된 시대가 도래함으로서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고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엡 0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 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③끝까지 순종하시는 모습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씀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프로그램에 끝까지 순종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이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서 삼상 02:06절에 보면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 도다 했습니다. 즉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시는 고백입니다. 우리도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께 전부를 맡기는 신뢰와 신앙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과 똑같은 성정을 가지신 예수님은 아픔을 알고 고통을 알고, 저주와 모욕을 받으시면서 십자가의 대속의 사명을 위하여 끝까지 순종하시고 있습니니다.

 

사 53:0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는 이 순간은,

①버림받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십자가의 최고봉의 순간이며(딤전 02:04),

②죄인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다는 산 교훈이며(계 21:08),

③예수님이 인간 대신 버림을 받으시는 순간이며(사 53:04~06) 기독교야말로 고난의 종교임을 다시금 일러주시는 것입니다.

 


제 5언. 내가 목마르다.-요 19:28. 생수의 종교-


내가 목마르다(요 19:20)
라는 이 말씀은 목마른 인생을 위하여 주님이 대신 목말라 주시고 계심을 상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인생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목마른 삶을 살고 있으며 저마다의 갈증을 해결하려는 샘을 파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돈의 샘을 파고, 어떤 사람은 권력의 샘을 파고, 어떤 이는 지식과 명성의 샘을 파고, 어떤 이는 쾌락의 샘을 파고, 어떤 이는 유행의 샘을 파고 있지만 그러나 세상에서 주는 물은 그 어떤 것으로도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요 0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솔로몬 왕도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맛보고 난 후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01:02) 하면서 인생의 목마름을 단적으로 표현하였고 선지자 예레미야 역시,

렘 02:13 내 백성이 두 가지를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고 말하였습니다.

 

즉 인생의 갈증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였는데 하나님을 떠난 것이 바로 절대적인 갈증의 원인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갈증을 느끼고 있는 인간에게 근본적인 갈증의 해소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대신 내가 목마르다 하고 외치신 이 순간은 참 생명의 물줄기를 터뜨려 놓으시는 순간이며 자기의 몸을 터뜨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줄기를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04:14) 하셨습니다.

 

①목마른 인생은 예수님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와야만 살 수 있으며 반대로 주님을 떠난 인생은 어디를 가도 목마른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가 그리워서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을 행하여 나갔지만 도중에 광야에서 처음으로 맞은 어려움이 물이 없어 목이 마르는 고통이었습니다.

갈증을 참지 못한 그들은 살인자의 모습으로 돌변하여 돌을 들어 모세를 치려하였지만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함으로 갈증을 면케 하였습니다.

갈증에 시달리던 저들이 마음껏 물을 마셨지만 그러나 몇 날이 못되어 그들은 또 다시 목말라야 하는 갈증에 시달렸습니다. 이와 같은 목마름을 누가 해결할 수 있습니까? 주님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날도,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은 의식주에 목마르고, 물질과 명예에 목마르고, 자유에 목마르고, 사랑과 애정에 목마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한 목마름은 영적인 목마름 아닙니까? 이에 대해 아모스 선지자는,

 

암 0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방법은 생수의 말씀을 베푸시는 하나님께로 나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 55:0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0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갈한 인생을 위하여 친히 목마른 고통을 받으신 것은 우리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하여서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이 자리에 함께하신 모든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도 성도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계속 목말라 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혹 애정이 목마릅니까? 아니면 경제적으로 목마릅니까? 목마름을 해갈해 주시는 주님께로 나아오십시오.

 

요 0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제 6언. 다 이루었다.-요 19:30. 완성의 종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극심한 고통으로 목말라 하실 때 사람들은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주님의 입에 마시게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복음서 기자들은 그 현장을 조금씩 달리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27: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막 15: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요 19: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이 세 가지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주님은 심히 목마르신 가운데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주었지만 마시기를 거절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의 포도주는 쓸개와 몰약을 탄 포도주로서 이는 당시에 고통을 잊게 하는 일종의 마취제로 쓰였는데 그러나 예수님은 신 포도주 같은 마취제로 십자가의 고통이 경감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타는 갈증과 목마름이 극도에 달하였음에도 세상이 주는 것으로 위로 받기를 거부하셨는데 그러면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고 하신 말씀은 어떠한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까?

 

①예수님은 구원 사역의 완성자 이심을 나타내십니다.

우리네 인생은 백 년을 산다 할지라도 다 이루었다고 말 할 수 있는 완성자가 없지만 예수님은 짧은 삼 년의 공적인 생애를 사시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므로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확증하는 사랑의 완성자이기도 하셨습니다.

 

요일 0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②우리는 다 이루신 주님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부족하고 연약한 인생인지라 다 이루고 갈 수가 없으며 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들은 그 어느 누구도 자기의 계획을 다 이루고 가지를 못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120년까지는 거뜬하게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하죠.
예 그렇게 살면 좋지요. 그러나 그렇게 무난하게 산다고 해도 우리의 일들을 다 이루고 가지를 못합니다.
명예와 권세를 가진 자도,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도, 자신의 꿈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으며 자녀나 부부가 가진 꿈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는데 다 이루신 그 주님 승리하신 주님께서 나의 하는 일에 힘을 실어 주시기만 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이룰 수 있습니다. 동시에 기독교는 완성의 종교입니다.

내가 나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어도 주님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완성의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골 0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요일 05:0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우리의 믿음이니라.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나는 할 수 없고, 나는 다 이룰 수 없어도, 주님의 은혜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음을 믿고 살아갑시다. 가난한 자에게는 부요함을 채워 주시고, 병든 자에게는 건강으로 채워 주시고, 실패한 자에게는 성공으로 채워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는 능력으로 채워 주시고, 절망한 자에게는 소망으로 채워 주시는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막 0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빌 0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제 7언.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소망의 종교-


마지막으로 제 7언의
말씀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운명하셨는데 당시의 사형 집행관 백부장은 그 되어진 일을 보고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고 하였고(마 27:54), 구경하러 모인 많은 사람들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눅 23:48).

그리고 가상칠언 중 세 마디가 기도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는 제 7언은 온전한 신뢰와 사랑의 기도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상칠언의 마지막 말씀 속에서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데 바로 우리의 현실이 닫히게 되면 다음 세상으로 연결되는 소망의 세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①우리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다른 피조물과 완전히 구분되어지는 내용으로서 인간만이 영혼이 있다는 말입니다. 영혼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그 속에 부어 주신 생기인데 이 영혼이 있음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연결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창 02:07; 전 12:07).

 

②내 영혼의 주인은 내가 아니요 하나님이심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듯이 지금도 영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고 하나님이 거두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내 생명 내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임을 눅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의 사건에서 알 수 있습니다.

 

눅 12:18.......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20.......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③사람이 죽은 후에는 영과 육이 분리되어 영은 하나님의 나라로 가고 육은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복음은 제자들에게 맡기시고, 옷은 군사들에게 맡기시고, 모친은 요한에게, 육신은 아리마대 요셉에게 그리고 영혼은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셔 들이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부탁할 대상을 찾지 못하여 금이나 은이 또는 돌에다가 정성을 기울이면서 절을 하며 부귀영화를 빌고 있습니다.

말도 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그 우상을 향하여 사람들은 자식들의 장래를 부탁하고, 사업을 부탁하고, 미래를 부탁하고, 자신의 사후 장래까지도 부탁합니다. 하지만 오늘 저와 여러분은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부탁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바로 이 분께 우리의 가정을 부탁하고, 우리의 사업이나 장래를 부탁하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부탁합시다. 능히 해결함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④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의 영혼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고 하였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이 인간의 생명이요 영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신 사람은 그 영혼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분명히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요 14:06절에 의하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믿음의 삼일 가족들이 한 사람도 낙오됨이 없이 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서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표시와 사랑을
나타내는 표식으로서 사람들은 누구나 십자가를 떠올리며 십자가 하면 기독교를 말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십자가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다니기도 합니다.
특별히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장 교회가 많은 나라요 도시마다 거리마다 십자가 탑이 높이 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본래 사형 도구의 하나로서 로마에서는 주로 탈주한 노예, 내란 선동자, 살인자, 반역자 등 중죄인들을 괴롭혀 죽이기 위해 고안해 낸 형틀입니다.  그래서 사형수들은 나무형틀 위에서 갖은 고통을 당하며 때로는 며칠씩 신음한 끝에 메말라 죽게 됩니다.


특히 팔레스타인에서는
십자가형이 정치적인 폭도들의 소요억제책으로 집행되었으며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인들의 잦은 반란과 항거가 일어나 정치적 소요를 일으켰던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따라서 반역죄로 기소 된 예수님은 십자가형에 처해졌으나 그러한 십자가가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이후로는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으니 이것이 역사의 아이러니 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가상칠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한없는 은혜와, 놀라운 축복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은혜를 나만 알고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이웃과 친척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널리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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