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uality/聖經硏究

'견인' 이란 무엇인가

天上 2016. 9. 17. 21:26

'견인' 이란 무엇인가

 영지주의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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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로 주님을 거부하고 육을 따라 아둥바둥하는 성도를 
주님이 강제로 견인해가는 경우가 있다고 본다면 
모든 '견인'을 위의 비유처럼 쉽게 적용해도 무방하지요.
 
그런데 이런 식의 견인적용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견인을 총론적 견지에서 보아,
결국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다고 보는것은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성도 개개인의 삶에서 쉴새없이 일어나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대처하게 할때
이렇게 견인을 설명하면 상당히 무책임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견인'은 사람을 확실하게 '설득'하는 겁니다.
설득하는 길고 지리한 싸움과 인내를 결코 축소하거나 간과하지 않는다는데서
일종의 '무력'이 내포되어 있긴 하지만요.
 
설득한다는게 처음에는 말씀을 통해서 이성과 양심과 믿음의 수준에 호소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지나면 잠잠합니다.
그 다음은 자기 생명을 자기가 괴롭히는 형국으로 사는 겁니다.
그럴때 지혜로운 자는 속히 돌아섭니다. 그러나 우매한 사람은 계속 밀고 가지요.
자초한 고통을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로 알아차릴만큼 지혜가 있으면 돌아서서 주님께
설득되는 자로서 좋은 결과를 갖게 되지만, 성도임에도 완악한 마음으로 사태를 험한 지경까지
몰고 가는 사람도 엄연히 존재합니다. 오히려 더 많지요.
 
그러다가 죽기 직전에 후회와 반성으로 "주여, 용서를.."하고 죽는다면, 그게 견인일까요?
죽기 직전에 정말로 정직한 회개를 했다고 합시다..그러나 그런 그가 천국에 들어갔든 어쨌든,,
우리가 견인이라고 부를만한 무엇이 그의 삶에 존재했다고 봐야 합니까?
 
견인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되, 설득하고 설복시키는 합의를 존중합니다.
인격 대 인격으로서 말입니다. 이게 우리 쪽에서 오히려 두려움이면서 신비죠.
동시에 영광스러움이구요. 인간으로 산다는거, 이거 보통 일 아닙니다.
 
나아가 우리가 보통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에 인식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종국에 도달하는 천국"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요.
어쨌든 불지옥보다는 천국의 거지가 낫다는 거지요.
 
그러나 구원이 단지 지옥에서의 건짐으로 평가절하되는건 보혈에의 모욕입니다.
견인을 보는 관점의 차이는 여기 있다고 판단됩니다. 견인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냐는 거죠.
기어이 잡아채다가 어떻게든 천국에 쑤셔넣는 사랑입니까? 아니잖아요. 날마다 현재적인
천국 삶을 살게 하는게 견인의 목적입니다.
마지막에 도달하는 천국을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즉, 지금, 여기 영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진리의 능력이 견인입니다. 그 능력의 보혜사로서 성령이 와 계신거구요.
 
그런데 그 성령이 우리의 의지를 다스리고 설득시키고 수준을 높여가는
갖가지 사역을 하시면서도 계속 요구하시는게 우리의 '순종' 입니다.
왜요. 창조법칙에서부터 근본적으로 우리는 의지를 부여받은 고유한 존재들이기 때문이에요.
그게 인간입니다. 천사에게도 없는 독특한 영광이죠.
그 점을 극명하게 부각시킨 분이 예수님 아닙니까. 순종으로 새 인류의 첫 사람이 되신 거구요.
 
견인을 일방적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뭐 어떻게든 그 사랑은 하실 것이야 라고 감격하면
상당히 뭉클하고 감동은 있지만 사실이 아닌거죠. 견인은 지금 현재 천국과 잇닿은 우리 삶을
보호하고 관리하고 설득하여 영생을 맛보게 하는 힘이지만, 인간의 의지를 설득하여 순종하게 
하는 과정을 넘어서지는 않습니다. 억지로 그 사랑을 거부하고 선을 넘어서면 그때부터 인간은
잃어버린 상태가 됩니다. 구원을 잃었냐고 묻지 마십시오. 구원하신 주님과의 관계를 거부한 사람이
천국에는 계속 유효한가만을 궁금해 하는것은 본질에서 먼 생각입니다.
(항상 그런 사고체계에서 맴돌기에 구원의 개념이 혼란스럽게 됨)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에게서 떨어져 사는게 얼마나 스스로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인지
알게 해주는 것이 적확한 사태해결 방식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너는 구원받은 자란다, 돌아오기만 해라' 가 아니에요. 
구원은 도리어 그 사람에게 다시 임해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능력이 다시 그에게 임해지도록 그가 주님 앞에 마음을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견인이든 뭐든 신앙의 모든 측면을 살필때 '관계성'을 배제하는 류의
가르침과 사상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지 하나님 쪽의 견인으로만 해결된다면, 심판도, 공의도
논할 필요가 없으며, 자유의지나 순종은 더더구나 논외가 되죠.  
견인.
하나님 쪽에서는 내밀고 계신 강인한 팔이고,
우리 쪽에서는 그 손을 의지하며 간절히 바라보는 열린 마음으로 성립됩니다.

2006. 7 (숭사리개혁포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