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歷史

조선 국왕들의 재미있는 일화들!

天上 2016. 11. 26. 08:48

조선 국왕들의 재미있는 일화들!


01. 태종

1. 직업정신 투철한 사관이 따라다니며 일거수 일투족을 다 기록해서

 태종이 걷다 헛발질한 것도 적었다.

태종이 그건 제발 지워달라, 창피하다 애원까지 했는데도 사관은 끝까지

"왕이 길을 걷다 헛발질하다.

헛발질한 것을 적지 말라고 말한 것은 적지 말라 명하셨다"라고 적었다.

 

2. 하도 사관이 쫓아다녀서 못 쫓아오게 멀리까지 사냥을 나갔는데

사관이 거기까지 말 타고 쫓아와 사냥기록을 적었다고 한다.

 

3. 태종은 아들 양녕대군이 너무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자

 속이 상해 밤새 울어 목이 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점은 양녕대군의 아들인 이혜는

아버지인 양녕대군보다 더 많은 사고를 쳐 양녕대군의 속을 썩혔고

결국 왕자의 아들의 직위인 '군'의 작위가 깎여 서산군에서 서산윤으로 강등당했다.

결국 이혜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자살시도를 하였고 이틀 뒤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혜는 사람을 때려 죽이라고 시키기도 하였고 직접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으며

 남의 첩을 빼앗기도 하고 시전에서 종친들과 패싸움을 하였고

과격한 놀이판을 벌이다 놀이 중 사람이 죽어나가게 하기도 하였다.

 실록에서는 이혜가 망가진 원인을 사랑했던 첩을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난 후에

 울화병이 생겨 이리 되었다고 한다.)

 

 

02. 세종

1. 세종대왕은 좋아하던 후궁에게 신하들 몰래 따로 불러서

말없이귤 하나를 쑥~ 내밀어준 얘기도 있다. (그 당시 귤이 귀한 것이었다.)

2. 친경한다고, 소 끌고 밭 갈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 배고픔을 못 견뎌

밭 갈던 소를 때려잡아서 국 끓여 먹은 적도...

 

3. 명재상 황희는 청백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었다.

임금이 사람을 붙여 철저하게 감시하고 너무도 기분 나쁘게 점검하는 바람에

"내참 더러워서 뇌물 먹지 않으리라" 결심한 케이스다.

 

4. 훈민정음 반포식을 축하하는 잔치 행사에는 집현전 학사 절반이 참석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살인적인 과중한 업무와 임금의 요구사항에 시달리다 못 견뎌

 병석에 누운 탓이었다.

성군의 캐치프레이즈는 신하가 고달파야 백성이 편안하다'였다.

 

5. 세종은 부하들을 휘몰아치는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아침 조회격인 새벽 4시 상참에서부터 과업 달성이 부진한 부하들을 닦달하였다.

 밤낮으로 시달리다 못한 김종서의 경우 임금 곁에 있다가는 제명에 못살 것 같아,

스스로 궁궐을 떠나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을 개척하겠다고 손을 들고 나섰다.

정인지는 임금이 너무 독촉하고 소위 '갈궈대는' 바람에

 모친 3년상을 핑계로 상소를 올리고 낙향하려 했으나,

임금은 법령까지 바꿔서 그를 다시 붙잡아다 오히려 일을 더 시켰다.

 

6. 양녕대군이 평안도를 유람하게 되어

세종은 형인 양녕대군에게 "제발 여색을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몰래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만일 양녕대군이 기생을 가까이 하거든 즉시 그 기생을 역마에 태워 서울로 올려 보내라"라고 하였다.

 양녕은 세종과의 약속도 있고 하여 가는 곳 마다 기생의 수청을 물리치고 근신하였으나,

 그가 평안북도 정주에 이르렀을 때 그만 양녕의 마음을 사로잡는 절세의 미인이 나타났다.

양녕은 그날로 동침하고 귀신도 모르리라 자신했다.

그래서 시를 지어 하룻밤 풋사랑을 읊기를

"아무리 달이 밝다하나 우리 두 사람의 베게를 들여다 보진 못할 것이다.

 그런데 바람은 어이해서 신방을 가린 엷은 휘장을 걷어 올리는가"라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정주 수령은 이 기생을 역마에 태워서 서울로 보냈다.

세종이 기생에게 명하기를 "너는 양녕대군이 읊은 시를 노래로 불러 익혀두라" 하였다.

 

양녕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유유히 서울로 돌아와 세종을 알현하였다.

세종 : 잘 다녀오셨습니까.

제가 신신당부한 말씀을 잘 지켜주셨는지요?
양녕 : 물론입니다.

어찌 어명을 어기겠습니까?

한 번도 여색을 가까이 한 일 없습니다.
세종 :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제가 형님의 노고를 덜어 드리고자 가무를 준비하였습니다.

양녕은 기생이 나와 노래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그런데 가사를 들어보니 자신이 지은 시구가 아닌가.

깜짝 놀란 양녕은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세종은 웃으며 뜰에 내려와 형님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그날 밤 그 기생을 양녕댁에 보냈다.

 

7. 나라에 큰 일이 있어, 모두 고기를 먹지 않는 기간이었다.

태종은 특별히 세종에게는 삼시 세끼 고기를 챙겨먹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충녕(세종)이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03. 문종

1. 수염이 매우 풍성하여 관운장과 같은 풍모를 냈었고, 얼굴 또한 매우 잘생겼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궁을 정리하는데 타다 남은 왕의 어진이 한 장 나왔다.

수염이 길고, 풍채도 당당하여 신하들은 인종의 어진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사람만은 수염이 길다는 말만 듣고 문종의 어진이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어진을 조사하다가 보니 어진 구석에 문종대왕의 어진이라는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

 

2. 학식, 외모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단 하나... 건강

 

 

04. 세조

1. 술 먹고 신하 팔 꼬집고 신하한테 "너도 나 꼬집어라"라고 시키자 신하는 세조를 꼬집었다.

그 뒤 자기 혼자 열 받아서 혼내주려다 그냥 넘어갔다.

세조의 팔을 꼬집은 것은 신숙주다.

정확히 말하면 꼬집은 게 아니라 팔씨름 하다가 세조의 팔을 두 손으로 넘겼다.

그래서 세조가 신숙주를 죽이려고 했다가, 술 취한 것을 감안하여 넘어갔다.

 

2. 세조는 후궁이 단 한 명뿐이고 평생 중전인 정희왕후와 금슬이 좋았는데,

국사를 논할 때도, 국가의 모든 행사에도 꼭 정희왕후를 대동했으며

사냥을 할 때도 둘이 나란히 말을 타고 사냥에 나갔다.

 

 

05. 성종

1. 성종은 후추 중개무역으로 돈을 벌기 위해 후추 씨앗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결국 후추는 구하지 못 하고 주변국에 성종이 후추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

계속해서 조공으로 후추가 들어오는 바람에 창고에 후추가 가득히 쌓여,

 예쁜 비단 주머니에 담아 조정 관리들에게 다 하사하였다.

06. 연산군

1. 성종과 연산군이 오랜만에 밖에 바람 쐬러 나와서 성종이 "융아, 좋지 않으냐?"하니

 연산군이 소떼를 보며

"아바마마 저 송아지도 어미 소가 있는데 저는 왜 어미가 없습니까"라고 말했다.

 

2. 또 다른 야사에서는 연산이 동궁이었을 때

어느 날 성종에게 거리에서 나가 놀고 싶다고 하여 성종이 허락하였다.

저녁에 동궁이 궁궐로 돌아오자 성종이 "오늘은 밖에서 무엇을 보았느냐?"하고 묻자

연산은 "구경할만한 것은 없었습니다.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를 따라가는데

그 어미 소가 울면 송아지도 따라 우니 그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여 성종이 가여워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짐.

 

3. 공부하는 걸 엄청 싫어하여, 왕자를 훈육하는 학자들이 엄청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매일 꾸중 듣고 야단맞아,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모두 죽여버렸다.

 

4. 춤을 잘 췄다고 한다.

 

5. 모후인 폐비 윤씨와 고려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얼굴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관공서에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수집하게 한 일도 있었다.

 

6. 엄청난 꽃미남이었다고 한다.

 

 

07. 중종

1. 자식 사랑이 남달라서 공주, 옹주랑 왕자들이 오랜만에 문안 오면 눈물을 흘렸다.

오면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2. 또 중종은 동궁 전에서 불이 나자 맨발로 달려나와 훗날의 인종을 애타게 부르며 울었다.

 

3. 또한 효정옹주의 남편(부마)이 바람을 피우고 다니자

 철거지악이었던 질투를 하지 않는다고 딸을 꾸짖은 적도 있었다.

결국 효정옹주가 남편의 구박을 견디지 못 하고 죽자 직접 부마를 잡아와 친국을 하기도 했다.

 

 

08. 인종

1. 인종은 모후인 장경왕후가 자신을 낳고 7일만에 죽자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손에 자란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어린 인종을 끈임 없이 못살게 굴었다.

하루는 밤에 쥐의 꼬리에 불을 붙이고 인종이 잠을 자고 있는 궁 안에 들여 보냈다.

인종이 창문을 보니 문정왕후가 웃으며 빨리 불이 타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빈궁만 내보내고 자신은 문정왕후에게 효를 행하기 위해 불 속에서 죽으려 했다.

빈궁과 인종이 어쩔 수 없이 불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그때, 밖에서 중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종은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게는 효가 되지만 중종에게는 불효가 되므로 곧바로 나왔다.

그 후 인종은 불을 지른 장본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중종에게 고하지 않았다.

 

 

09. 명종

1. 다른 사람들은 다 물러가 있거라 하고 노래 잘 부르는 내관이랑 둘이서 내관은 노래 부르게 하고

명종은 그에 맞게 춤추며 2인조 가수 못지 않게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2. 꾀병 부려서 총애하는 내관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3. 위의 내관은 동일인물로 남자이다.

 

4. 내시와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던 명종은 몸이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 경연을 취소하고 내관들과 놀러 다니기 일쑤였다.

 

 

10. 선조

1. 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을 하는데,

의주에서 어느 백성에게 생선이 올려진 상을 접대 받았다.

그 생선이 너무 맛있어서 인조가 생선의 이름을 묻자,

 백성은 '묵'이라 대답하였다.

선조는 생선의 이름이 그 맛에 비해 별볼일 없다 생각하여 '은어'라 명했다.

나중에 궁에 돌아와 그 생선을 먹었으나...

맛이 전 같이 않아 '도로 묵'이라 하게 하였는데,

바로 여기서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11. 광해군

1. 선조가 세자를 가리기 위해 여러 왕자를 시험하였는데

 "반찬을 만드는 것 중 무엇이 제일이냐?"라는 질문에

 광해군이 "소금이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그 이유를 묻자

 "여러 가지 맛을 조화시키려면 소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라고 답하여

 그 현명함을 인정받았다.

이에 선조가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느냐?"라고 묻자,

광해군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가장 애통하옵니다."라고 답하였다.

 

 

12. 효종


1. 나르시즘에 빠져, 항상 거울을 볼 땐 스스로 만족에 차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2. 일부일처제를 지켰다고 한다.

 

 

13. 숙종

1. 신하들이 따뜻한 온돌방에서 꾸벅꾸벅 졸자 온돌을 빼버리고 얼음장에서 일하게 하였다.

 

 

14. 인조

1. 자신의 몸과 봉림대군의 몸이 아프자, 소현세자의 아내가 저주를 내려서 아프다고 하여

사약을 내리고 가족들을 모두 죽였다.

소현세자를 죽일 때 11살과 6살이던 아들들도 다 죽이고 임신했던 세자빈까지 죽였다.


 

15. 영조

1. 연애소설을 좋아하여 가끔 자신의 글에서도 소설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성품이 근검하여 백성들에게 사치를 금하라는 뜻으로 금주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2. 영조의 어진에 나와있는 쌍꺼풀지고 길쭉한 눈과 오뚝한 코에 조그마한 입술은

조선의 남자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미인상이었다.

왕실에서는 이런 외모를 천하다 하여 기피하였으나,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양반 사대부가 출신이 아닌 무수리 출신에서

 정1품 빈까지 신분상승 한 것을 감안할 때, 숙빈 최씨는 굉장한 미인이지 않았을까.

 

3. 영조가 왕위에 등극하기 전, 연잉군이었던 시절

 달성 서씨 집안의 규수(정성왕후)를 아내로 맞이하여 첫날밤을 치를 때의 일이다.

영조가 아내의 손을 잡고 "손이 참으로 곱다."면서 칭찬을 하자,

연잉군 부인이 무심코 "궂은 일을 해본 적이 없어 그렇다"고 했더니

영조가 그날로 부인을 소박하며 그 다음부터는 멀리하였다.

아마, 무수리로 고생했던 어머니의 거친 손과 발을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4.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간택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쓰인 방석에 앉지 않자,

그 이유를 물으니"자식이 어찌 아버지의 존함이 쓰인 방석을 깔고 앉겠습니까." 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또 "고개 중에는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드냐"고 묻자,

강원도에서 온 규수가 대관령고개라 답하고 경상도에서 온 규수가 추풍령고개라 답하였다.

헌데 김규수는 보릿고개라 대답하였다.

보릿고개라! 겨울 양식이 봄이 되자 다 떨어지고 그렇다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지 아니한 때

 세 끼, 아니 두 끼, 심지어 한 끼를 채우기가 그 얼마나 난감한가.

이것이 보릿고개인데 김규수가 넘기 힘든 고개가 바로 보릿고개라 하니 얼마나 명답인가!

다음으로 꽃 중에 제일인 꽃을 묻자, 김규수는 목화 꽃이 제일이라 답하였다.

이유를 물으니,

 "목화 꽃이 다른 꽃들보다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않지만핀 연후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면에서는 다른 꽃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꽃이니,

바로 목화가 백성의 옷감이 되어서 예절도 지키고 품격도 살리고

추울 때 보호하여 주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였다.

 

 

16. 정조


1. 정조가 말하길,

"매양 취침하기 전에 두 발바닥의 가운데를 마주 문질러 비비면 기운이 절로 퍼진다.

내가 밤마다 시험해 보았는데,

처음에는 힘이 드는 듯 했으나 오래도록 계속 했더니 신통한 효험이 있다."

 

2. 연애소설을 비롯한 소설을 무척 싫어하여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서고에 있던 모든 소설을 불태웠다.

또한 숙직을 하던 집현전 학자들이 몰래 연애소설을 읽고 있다 들켜서

 정조에게 혼이 났고 벼슬을 삭탈했다.

그들은 정조에게 다시는 소설을 안 보겠다는 반성문을 쓰고 나서야

벼슬길을 다시 열어주었다.

 

3. 영조는 근검하여 백성이 먹을 쌀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정조는 개인적으로 술을 너무 좋아해서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금주령을 없앴다.

 

4. 공부 못하는 신하한테 공부하라고 끈임없이 시키며,

숙제를 내고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망신을 주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신하에게 술을 강요하여 기절할 때까지 마시게 하고,

 활을 못 쏘는 신하에게 끈임 없이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5. 술을 무진장 좋아하여,

정약용에게 필통에 술 한가득 부어 원샷! 하기를 강요하여

정약용은 술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 필통에 술 붓기라면,

요즘 사발에 소주를 들이붓는 거와 맞 먹는다고 한다.

 

6. 정조 임금이 정약용한테 높은 벼슬주려고 시험 열었는데

정약용이 1등을 못하고 맨날 3등만 해서 결국 화나서

"경은 그거밖에 못하오?"하면서 베개를 던졌다.

 

 

17. 헌종

1. 헌종이 그렇게 미남이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여색을 즐기는 왕 때문에

궁궐 내 용모가 예쁘다고 하는 궁녀들은 거의 성은을 입었다고 한다.

(덕분에 후궁첩지도 아무나 내리지 못했음. 딸을 낳은 궁인 김씨도 첩지를 받지 못했다.)

 

왕 자체가 너무 미남이라 젊은 궁인들이 참 많이 유혹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부터 가진 잦은 성관계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죽기 직전에는 피가래까지 토하며 고생하다가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한다.

궁녀들이 유혹을 할 정도였으니 엄청난 미남이 아니었나 한다.

 

2. 헌종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늘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 아프게 여겨

한 신하에게 늘 물었는데,

"진전에 모신 수용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니 헌종이 거울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18. 고종

1. 고종황제가 행차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어찌 저런 일을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고 귀빈들이 하느냐" 고 안타까워 했다.

2. 명성황후가 죽고 나서 끝까지 재혼을 하지 않았지만

아끼던 후궁이 있었는데 명성황후가 부리던 상궁이었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그녀를 곁에 둔 이유가

 못생겨서 고종이 쳐다도 안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곁에 두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녀는 명성황후와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씨조선 역대王 들의 사망 원인

 

 

 

* 제1대 태조 

청심원을 다 삼키지 못하고, 중풍으로 74세에 승하
아들 태종과의 마찰로 인한 홧병도 그 원인 중 하나
능은 건원릉 동구릉안에 있다. 


* 제2대 정종 

오복(五福;수,부,강녕,유호덕,고종명)을 다 갖추고 63세에 승하
상왕으로 물러난 후 편안하게 살면서 가장 많은 자식을 둔 왕임
조선역대왕중 유일하게 북한에 있는 후릉(경기도 판문군 영정리) 


* 제3대 태종 

상왕으로 물러난 후 태종은 폐렴으로 56세에 승하 
부인민씨도 학질로 56세졸
능은 헌릉 


* 제4대 세종 

대식가로 당뇨병으로 54세에 승하
고기를 매우 즐긴 왕, 식단에 항상 고기가 있었음,그래서 종기가 많이 났음
그리고 여러 부인을 둔 만큼 성병도 있었다고 함. 
소형왕후 심씨와 합장함으로써 조선최초 합장릉, 능은 영릉


* 제5대 문종 

등창으로 39세에 승하, 아버지 세종을 닮아 몸이 허약했음, 능은 현릉 


* 제6대 단종 

수양대군의 '계유정란'으로 17살때 서인(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포에서 사사됨.

 숙종때 단종으로 복위, 
능은 장릉 


* 제7대 세조 

악업으로 문둥병과 불면증으로 52세에 승하. 
능은 광릉 


* 제8대 예종 

20세에 복상사 하여 승하 
안순왕후 한씨 정사를 즐기다 승하했으며, 
형 의경세자(성종의 아버지, 덕종)도 20세에 급사, 
능은 창릉 


* 제9대 성종 

등창과 폐병으로 38세에 승하 
28명의 자식을 두었고 주색을 즐긴 카사노바였다. 
능은 선릉이며,
임진왜란때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에 태워지는 수모를 격는다. 


* 제10대 연산군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후,강화도로 유배 강화도에서 괴질로 31세졸. 
아들 넷은 강화도에서 사사됨. 
묘는, 서울 방학동


* 제11대 중종 

거머리로 등창을 치료하다 울화병과 노환으로 57세에 승하 
재위 39년, 
능은 정릉 


* 제12대 인종 

이질로 31세에 승하 
문정왕후에 의한 독살설도 있다. 
하늘이 낳은 효자로 알려져 있으며, 후사가없다 
능은 효릉 


* 제13대 명종 

지나친 방사로 34세에 승하 문정왕후의 아들로 마마보이로 성장 하였으며,
무수리출신 장씨와 지나친 방사로 인한 졸지에 승하. 
어머니 문정왕후한테 회초리도 맞았다고 함.
능은 강릉 


* 제14대 선조 

임진왜란 이후 중풍으로 57세에 승하 
영조 다음으로 41년간 재위.
능은 목릉 


* 제15대 광해 

가장 불운한 왕,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후 유배 그 뒤 십수년을 더 살다가 제주도에서 67세로 졸.
유배 생활 중에 시중 드는 사람이 '영감' 이라고 불러도 꿋꿋하게 견뎠다 함. 
이때 담배가 일본에서 들어옴. 


* 제16대 인조 

청나라에게 항복한 후, 홧병 걸림.

 신하들 손아귀에서 울화병으로 55세에 승하.
아들 소현세자 를 독살한(?) 왕으로 보고있으며,
재위중 늘 그것때문에 신하들에게 시달려 왔으며 
능은 장릉 


* 제17대 효종 

봉림대군

수전증있는 어의의 실수로 출혈사로 41세에 승하 
강한의지의 북벌정책을 마무리하지못하고 승하했으며 
능은 영릉 


* 제18대 현종 

청 황제에게 벌금형을 받은 임금으로 학질과 과로로 34세에 승하.
'하멜'에 의해 조선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능은 숭능 


* 제19대 숙종 

어릴적 천연두 후유증, 노인병, 등창 심한 당파 싸움으로인한 스트레스로 60세에 승하
인현왕후,장희빈과의 문제도 있었을 듯
풍류를 즐겼던 숙종은 봄이면 3000 후궁을 거느리고 큰잔치 별렸다한다.
능은 명릉 


* 제20대 경종 

게장을 먹다 급사하여 37세에 승하 
장희빈이 사약을 받기전 아들을 보게 해달라고 하자 거절하다 
인정에 끌려 세자를 데려오자 
갑자기 경종의 하초를 잡아당겨 성기능을 잃어 내시와 같았다 한다. 
능은 의릉 


* 제21대 영조 

장수 하였으며 치매로 83세에 승하 
세자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강등 한후 뒤주 속에 가둬 굶어 죽게 한 일과
늙어 노망 부린것이 오점으로 남았으며,
일본에서 '조엄'이 고구마를 처음가져왔다. 
능은 원릉 


* 제22대 정조 

개혁적인 군주, 사도세자(장조)의 아들 등창으로 49세에 승하
독살설도 있지만, 최근 자료로 보아 등창으로 승하한게 맞다고 봄.
안경을 처음 쓴 임금. 
능은 건릉 


* 제23대 순조 

매독 3기로 45세에 승하.

이때 나라는 콜레라가 창궐했으며,
안동김씨 세도가 시작되었다. 
능은 인릉 


* 제24대 헌종 

23세에 술과여자로 보내다 폐결핵으로 승하. 
능은 경릉 


* 제25대 철종 

세도정치에 의해 졸지에 왕이 된 강화도령 33세 폐결핵으로 승하.
강화도를 그리워 하며, 안동 김씨 그늘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채 살았다. 
능은 예릉 


* 제26대 고종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후 1919년 일제에 의해 독살되어 67세에 승하. 
능은 홍릉 


* 제27대 순종 

몸이 허약했고, 남성 구실을 못했다 함.
1926년, 라디오 들으면서 심장마비로 53세 승하. 
능은 유릉 


- 의친왕 

독립운동을 했던 고종의 아들,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형 
그의 아들 이우 왕자가 얼짱 왕자로 유명해졌다. 
현재 의친왕의 아들과 손자들이 다수 생존해 있다. 
1955년, 6.25전쟁 중에 걸린 영양실조로 79세로 서거. 
묘는 홍유릉 내의 의친왕 묘(합장묘) 


- 의민황태자 영친왕 

어릴 때 일제에 볼모로 잡혀간 비운의 황태자다. 
1963년 뇌혈전증으로 귀국해 7년간 병상에서 생활하다가
1970년 74세의 나이로 서거 
왕비인 이방자 여사는 자선 활동을 하다가 1989년 서거. 
능은 홍유릉 내의 영원(합장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