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직한 내시 김처선
충신은 목숨을 건다. 김자원이 승전색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 같은 내시부에 늙은 김처선(金處善·?~1505)이 있었다. 김처선은 연산군이 죽였다.
김처선은 세종 때 환관으로 궁에 들어간 이래 유배와 복직을 거듭했다.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포항에 유배 중이던 김처선은 김종서 반대파 집단 복직 때 함께 복직했다. 이후 행태가 기이했다. 2년 뒤 김처선은 금성대군과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돼 파직돼 노비로 전락했다. 그리고 2년 뒤 세조는 그를 복직시킨다. 공신으로 책록까지 해준다. 그런데 세조가 거둥하는데 시중을 들지 않고(1464년 세조10년 6월 27일), 시녀와 함께 만취해 길에서 뻗어버리는(1465년 세조 11년 9월 3일) 기행을 보였다. 그런 김처선이 성종 9년 정 2품 자헌대부로 승진했다. 장관이다.(1478년 성종 9년 12월 12일) 경국대전에 규정된 내시직 최고위 종2품보다 한 품계 위다. 사관(史官)이 '관직이 지나쳤다(官爵則濫矣)'고 할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업무 능력과 인격이 평가받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세조 앞에서 보인 추태도 왕을 모시는 데 빈틈없으라 교육받은 내시로서 할 바가 아니니, 불법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의 죽음이 이런 추정에 설득력을 준다.
내시 김처선의 죽음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
몸이 편안하여
어디서나 굳건하리라
口是禍之門舌是斬身刀
閉口深藏舌安身處處牢
1504년 3월 13일, 재위 10년차 연산군은 모든 내시에게 이 글귀를 새긴 나무패를 차게 하였다. 천하의 세조를 무시했던 김처선, 이미 수차례 연산군에게 직언했다가 곤장을 맞은 사내였다. 이듬해 4월 1일 실록은 이렇다. '환관 김처선을 금중(禁中·궁궐)에서 죽였다.' '연려실기술'은 그날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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