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歷史

사회주의의 시작과 끝

天上 2016. 4. 8. 22:06

 


사회주의의 시작과 끝

1984년에 발간된

박노해(朴勞解) 의 시집 ‘노동의 새벽’

1980년대를 상징하면서

‘민족문학 70년의

고투어린 핏방울이 스며있다’ 는 평가를 받으며

박노해 신화를 낳았다.

 

1957년 전남함평에서 태어난

그는 본명이 박기평(朴基平)이며

1989년 한국에서는

사회주의를 처음 공개적으로 천명한

‘남한사회주의 노동자연맹-사노맹

결성을 주도했다.

 

1991년

반국가단체 구성과 그 수괴로

활동한 죄목으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그는 1998년 8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의 사면으로

복역8년만에 교도소에서 나왔다.

 

그는

지난2월 세계를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으로

세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거기서

그는 말했다.

 

‘만약

지금 재심을 한다면

그때일이 무슨 죄가 되겠나,

군사독재였기 때문에

인간적인 몸부림이 처벌당했던 것이다.

(사노맹)이

누구를 죽인것도 아니고 파괴한것도 아니잖나.

사상의 자유를 가진 나라에

자본주의도 있고 사회주의도 있는 것이다.‘

그는 천주교 신자이기도 하다.

 

지난 2월 4일

세종문화회관에서의 기자간담회,

-지금도 사회주의를 믿는가.

-당연히 아니다,

나는 생태주의자, 페미니스트,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다.

 

-박노해가 말하는 보수란 어떤것인가.

-전통가치를 지키자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지말고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변절자 라고 하는데,

-투옥후 사회주의가 붕괴됐다. (1991년 소련의 붕괴)

호송차를 타고 오가다 만난 주사파들은

소련이 망한것이지 ‘주체사상’ 은 건전하다고 했다.

좀 있다가

스탈린이 망한것이지 레닌주의는 옳다고 했다.

6개월이 지나니

레닌주의가 잘못됐지 마르크스는 옳다고 했다.

그러더니

후기마르크스는 틀렸지만

초기 마르크스는 맞다고 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내가 믿었던 진리를 철저하게 성찰했다.

사회주의는 잘못된 것이었다.

 

그래서

국가 정치체제로서의 사회주의는 아니지만

그것이 담지한 비판정신은

계승하겠다고 했더니 변절자라고 한다.

 

사회주의는 잘못된 것이지만

그것이

담지한 비판정신은 계승하겠다는

박노해의 고백은

사실 핵심을 찌르는 말이다.

 

마르크스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자기시대의 사회적 모순을 꿰뚫어본

그의 안목은 놀라운것이며

이점

나도 늘 공감하고 있다.

우리모두가 ‘오늘’을 기준으로

어제’를 재단하면 안되는 이유가

그 안에있다.

 

똑같이

‘어제’를 기준으로 ‘오늘’을 재단해서도 안된다.

시대에 따라

기준이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연봉1억원을

받는 노동자들이 지천이고

사업주의 발목까지 잡고있는

노동귀족’ 이 존재하는 오늘

공산당선언’ 은 설 자리가 없는게 그런이유다.

 

칼 마르크스(1818-1883)는,

헤겔에서 이탈한후

포이에르 바하의 ‘유물론’ 에 심취,

푸롤레타리아의 공산주의,

노동자계급의 입장과 혁명을 주장하며

1848년 ‘공산당선언’을 발표한다.

여기에는

1844년 폴란드 동남부의 슐레지엔

(당시는 프로이센영토)에서

3000여명의 직조공들이

자본주의적 착취와 봉건적 수탈이라는

이중고를 견디다못해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켜 직조기를 파괴하고

자본가의 집을 습격한 사건이

영향을 준것도 사실 이다.

 

마르크스가 목격했던

노동자-직조공들의 참상은

기록으로 보존된 것이 드물다.

 

증기기관의 발명과 직조기(방적기)의 발명은

수많은 농촌인구를 공장으로 흡수했으며

열악한 환경에서

흑인노예수준의 노동을 강요당했다.

 

이제

거의 150여년전 스코틀랜드의

‘뉴래너크방직공장’ 의 사례를 통해

그 참상의 일부라도 살펴보자.

 

당시 노동자-직조공들은

보통 1주일에

6일동안 70-80시간을 일했다.

 

통풍시설이 없는

공장안에는 목화먼지가 날아다녔고

탁한공기와 기계의 열기로 질식,

실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요란한 기계소리에 그대로 노출,

귀가 먹는 것이 보통이었고

안전장치가 미흡해 작업중 부상은 다반사였다.

부상을 당해도 보상은 전혀 없었다.

일을 못하면 그대로 해고,

병이나서 결근하면 일당도 없었다.

 

유아원이 없어

아이를 맡길데가 없는 부모는

애를 데리고 나와 젖을 먹이면서 키웠고

서너살이 되면 엄마를 도와 일을했다.

6세 부터는 정식 노동자가 되었다.

 

작은 몸집으로

전속력으로 돌아가고있는

방적기계밑을 기어다니면서

떨어진 실과 천 조각을 주웠다.

 

끊어진 실을 잇기 쉬워

섬세한 원단직조에는

손가락이 가는 아이들을 많이 고용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이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본다면

천인공노할 일이지만

그때는 그게 당연했다.

마르크스가 본 것은

글자그대로

푸롤레타리아-무산대중의 참상이었으며

이들에 대한

무자비한 자본가의 수탈이었다.

 

그시대- 자기시대에

그런 ‘사회적문제’를 꿰뚫어 봤다는 것은

확실히

마르크스의 혜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노동과 자본주의의

무서운 모순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푸롤레타리아의 혁명을 역설했으며

종당에는

자본주의가 소멸한다고 믿었다.

 

과정으로서의

푸롤레타이라 독재는 필요했으며

그는

공산주의로 가는

중간과정을 사회주의로 정의했다.

 

문제의 핵심을 읽을수 있었던

혜안은 적중했지만

그의 예견은 빗나가고 말았다.

 

자본주의는 소멸하지 않았으며

사회주의는 실패했고, ,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만큼 가져가는

공산사회는 도래하지 않았다.

그것은

처음부터 실현불가능한 망상이었다.

 

사회주의는 잘못된 것이지만

그것이 담지한

비판정신은 계승하겠다는

박노해의 말은

그런의미에서 진실이다.

 

사회주의는 이상(理想)이고

자본주의는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짜르시대,

지하 공산당의 다수파인 볼세비키는

푸롤레타리아 주도하에

노동동맹으로 부르주아 민주혁명을 완성한후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시키는 노선을 견지,

1917년 10월혁명 으로 권력을 장악,

레닌이 이를 주도했으며

각국 공산당 결성의 지표가 되었다.

 

그러나

볼세비키의 10월혁명을

‘공산혁명’ 이라고 말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최근까지의 연구들은

혁명에 동조, 봉기한 민중들은

이데올로기로 무장했다기 보다

오래 계속된

짜르의 학정(虐政) 에 반기를 든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레닌에 이어

정권을 인수한 스탈린은 ‘철의 사나이’ 답게

짜르보다

더한 독재와 탄압을 계속했다.

 

동구(東歐)로 불리는

위성국들은 물론

크메르루즈의 재앙과

한국의 6.25 전쟁으로까지

점철된 동남아까지 그 세력을 넓혔으며

실로

이 기간중

직,간접으로 2억의 인간이 희생됐다.

 

혁명은 성공했으나

사회주의 평등은 오지않았고

새로운

‘노멘클라투라-특권계급’ 이 등장,

인민을 학대했다.

 

그들은

온갖 사치와 부를 누렸고

비밀경찰을 장악, 인민을 감시했으며

자기들의 적을 숙청해 나갔다.

짜르보다 몇배 심한 학정이었다.

볼세비키혁명후 74년이지난 1991년

이 악의 제국은

사회주의 실험에서 완전히 실패한채 붕괴되었다.

술에 취한 엘친은

탱크위에 올라서서 이를 전 세계게 알렸다.

 

1991년은

악의제국 소련이 붕괴한 해 이며

그해 5월,

나는 모스크바에 여러날 머물렀었다.

 

실로

그건 하늘이 내린 ‘기회’ 였다.

내가 사회주의 참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소련의 노벨상 작가인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고난 후 부터였다.

(문예출판사가 발간한

이책은 지금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아내의 표현대로

내가 읽은 사회주의(공산주의) 관계 책들을

쌓아놓으면 내키를 넘었을 것이다.

 

특히

마르크스의 ‘자본론’ 5권을 읽는데는

1년이 더 걸렸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커다란 지적자산이 되어

사회주의를 비판할수 있는

학문적 바탕이 되고 있다.

국내

사이비 좌자들의 행태를 보면

그들이

자본론을 만져보지도 못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책이

주 카나다 소련대사를 지낸

야코블레프의 ‘공산주의 종언’ 이다.

 

모스크바,

이 오래된 도시의 1991년 모습은

유령의 도시’ 그대로 였다.

 

그때 그곳에는

사회주의의 끝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내가

그 처참한 모습을 발로 걸어다니면서

손으로 만져보고

온몸으로 체험했다는 것은

그래서

커다란 ‘행운’ 이 아닐수 없다.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이 됐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올림픽때 지었다는 코스모스 호텔,

그러나

호텔에 들어섰을 때

리셉션데스크엔 사람이 없었다.

있을수 없는 일 이었다.

 

휴식시간이기 때문에

모두가 쉰다는 것이었으며

여직원들은

담배를 피우면서 잡담에 열중하고 있었다.

 

손님, 서비스 같은 개념자체가 없었다.

할수없이

응접용 소파에 않으려 하니

낡아찢어진 곳에 용수철이 튀어나와 있었다.

 

유럽기준,

2급정도의 객실은

침대의 스프링이 고르지 않아 숙면할 수가 없었다.

화장실의 화장지는 마분지 수준.

그리고

모스크바의 밤은 아주 어두웠다.

이튿날부터

둘러보기 시작한 이 수도에는

거짓말처럼

문을연 가게가 하나도 없었다.

 

물 한모금 사 마실데가 없었으며

점심식사도 호텔에 돌아와서 해야했다.

식재료 판매가 안되기 때문에

문을연 식당이 전혀 없는 것이다.

(북한이 운영하는

평양식당이 유일하게 문을열고 있었고,

맛은 형편 없었다.)

 

어디를 가든

집시보다 더 집요하게 덤벼드는 러이사인 행상들,

그리고

모두가 침울한 모습으로

큰 가방을 들고 다녔으며

어디서든 줄이 보이면 가서 섰다.

 

내가 서 본줄은,

하나는 립스틱 줄이었고

다른 하나는 담배줄 이었다.

전차나 버스의 도색이 너무 낡아

도시의 침울함을 더 했다.

 

호텔옆 쓰레기통을 뒤지는 아이들은

6.25 전쟁때의 우리같았다.

골목마다 늘어선 줄은

며칠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았다.

 

감자를 사기위해

그렇게 긴줄에 서 있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문을 열고있는

크레므린광장에 면한 굼 백화점은 조악하고

조잡한 물건만 있었고 살게 없었다.

 

모스크바 같은 유서깊은 큰 도시가

‘상업활동’ 이 정지되어 있다는 것은

흡사

흑백영화의 한 장면이 멈춰서 있는것과 같았다.

사회주의는

모스크바를 ‘죽은도시’ 로 만들었다.

광장

한 모퉁이에는 지하에 ‘레닌묘’ 가 있다.

그는

감색정장에 물방울 넥타이를 하고

튀어나온 이마를 드러낸채

유리관 속에서 미이라가 되어 누워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정중하게 마음속으로 말했다.

‘레닌선생,

혁명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소이다.‘

 

74년간의

사회주의 실험은 완전한 실패로 끝난 것이다.

그는 아무대답도 없었다.

살아난다 한들 무슨말을 하겠는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비교설명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래동안의 사회주의 섭렵을 끝내고 내린 결론은

뜻밖에 간단한 것이었다.

 

인간은

물질이 있어야 생존할수 있다.

결국 이데올로기는

인간이

그 물질을 소유하는 형태의 차이인 것이다.

 

자본주의에는 ‘내것’, ‘네것’,

그리고 ‘우리것’ 이 모두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에는 내것, 네것은 없고

‘우리것’ 만 있다.

산업시설의 국유화와 통제경제가 그것이다.

 

인간이 그 물질을

소유, 확대재생산, 발전시키는 것은

내것이며 네것이기 때문이다.

사유재산은

그 속성상 ‘효율’을 먹고사는데

그건

계량화 할 수 없는 기적같은 힘이다.

 

그러나

우리것’ 은 사실 아무의것도 아니다.

거기엔

애착도 효율도 있을수 없다.

 

사회주의 경제가

피폐해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북한의 개인텃밭

집단농장에 비해 몇배의 소출을 내는게 그 증거다.

 

개인의

‘사유재산-내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는 그래서 반인간적이다.

일당독재 때문에

사회주의 체제를 고집하는 중국도

경제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도입,

오늘의 부자나라가 됐다.

 

‘흰고양이든

검은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등소평의

실용주의가 중국의 먹는문제를 해결했다.

 

마르크스의 비판정신은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위해서도 살아있어야 한다.

지혜로운 유럽인들은

사회주의의 높은이상과

의회민주주의의 실용적인 방법을 접목,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를 발명했다.

오늘날

유럽의대부분의 국가들은

사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보호하는한

존속할 것이다.

아무리

그 안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해도

오래동안 검증된 장점들이

단점을 보완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이미

북한주민의 90%가

시장활동’을 통해 살고있으며

소득의 71%를 시장에서 챙긴다고 한다.

통일을 위해서는 좋은 현상이다.

 

시장보다 더 좋은

자본주의 실습장은 없기 때문이다.

배급을 줄 수 없는

사회주의는 페지될 수밖에 없다.

 

국제에너지 기구에 따르면,

북한의 총 발전량은

우리의 5%수준 이라고 한다.

 

제한적이나마

그 전기를 쓸 수 있는 인구도

26%에 불과하다고 한다.

 

전기,, 종이

생활수준을 가늠하는 바로메타다.

이제 사회주의의 끝은

평양에서도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 거대한 흐름은

무엇으로도 막지못한다.

송곳을 보자기에 싼다고 감추어 지는 것은 아니다.

-yorowon.

가져온 곳 : 
카페 >우대받는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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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地坪|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