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뜸醫學/灸堂先生님

'수난의 역사', 그 다음 시대를 위하여 2

天上 2014. 7. 8. 19:58
'수난의 역사', 그 다음 시대를 위하여 2

 

구당 발자취 / 구당 침뜸 이야기

2014/07/0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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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나는 민간요법으로 하자고 주장해왔다. 뜸뜨는 것은 별다른 재주가 필요 없이 1~2분이면 누구나 배울 수 있으며 부작용도 거의 없고 그 효과가 아주 좋다. 경혈을 제대로 찾아 뜸을 뜨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나 그 자리가 조금 틀려도 크게 상관없는 것도 장점이다.

#‘뜸의 이론과 실제’ 출판

인기가 좋았던 '뜸의 이론과 실제에 관한 강의 장면

어떻게 하면 뜸을 널리 알릴 수 있을까를 고심하다 ‘뜸 가정의학 사전’을 만들기로 했다. 각 질환에 관계된 경혈을 밝히고 질병과 증상마다 원인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어느 자리에 어떻게 뜸을 떠야 하는지 치료 방법을 자세하게 서술했다.

먼저 만들었던 뜸의 효능에 대해 설명한 작은 책자의 내용은 서두인 총설(叢說)에 담아, 1987년 첫 번째 단행본을 내게 되었다. 그게 바로 뜸의 이론과 실제 인데, 원고를 쓰는 데에만 3년이 걸렸다.

뜸에 대한 나의 경험과 이론을 정리하는 사이, 봉사활동도 점차 활발해졌다. 나한테 침을 배우고 싶다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한 명, 두명 생겨나더니 조금씩 계속 늘어났는데 이 사람들이 내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침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지금처럼 쉽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장기간 계속된 독재정권은 어떤 이유에서건 국민들이 모이는 것을 막으려 들었다.

교육현실은 더 척박해 학교에서 행해지는 이외의 교육은 거의 모두 불법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침뜸을 가르치고 배우겠다니! 소문이 조금씩 나자 행여나 서민들에게 침뜸을 가르칠까봐 침구사협회에는 침구교육을 금지한다는 공문이 수시로 날아들었고 현장을 적발하기 위한 함정수사와 표적수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졌던 시절이었다.

이런 사정이 조금 나아진 것은 노태우 정권의 후반인 1992년부터였다. 교육개방이 서서히 이루어지면서 사설단체에게 이러저러한 내용의 강습을 진행하는 일이 허용되었고 대중 사이에 인기를 끌면서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내가 침뜸 교육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도 이 무렵 이었다. 알음알음으로 나를 찾아온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1994년에는 <세계침구의학임상연구원>이라는 일종의 민간교육연구기관을 발족하게 되었다.

그뒤 이곳에서 함께 공부했던 이들로 <애구회(愛灸會)>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애구회>는 다시 <뜸사랑>으로 거듭났고 침뜸 의료봉사활동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뜸사랑> 회원들의 봉사활동은 2000년 전후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뜸사랑 봉사단’의 무료진료 감격
2000년 9월 ‘금산인삼축제’ 당시 <뜸사랑> 봉사단의 침뜸 무료진료는 감격적이었다. 금산인삼축제는 금산의 전통문화와 인삼을 비롯한 전통 약의 효능을 널리 알리는 건강축제였다.

단순히 지역축제의 차원을 넘어 전국에서 관광객과 구매자가 모여들고 인삼과 한국의 전통약재에 관심이 많은 외국인도 참가하는 자리였다.

그해 여름, 금산군수와 금산군 보건소장이 공문을 보내왔다. 9월1일 열리는 금산인삼축제에 와서 침뜸 의료봉사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인삼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한민국 대표 약재인 것과 같이 침과 뜸은 뛰어난 우리 전통의학의 핵심입니다. 부디 이번 행사에 참가하여 금산군민의 건강도 지키고 침뜸의 우수성도 널리 알리는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침과 뜸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이 넘쳐난다. 금산군의 요청을 받아들여 금산인삼축제에 갈 침뜸 봉사단을 구성한다는 안내가 나가자 지원자들이 넘쳐났다. 애초에 계획했던 봉사단의 숫자는 <뜸사랑>회원중 50명이었지만 참여하고자 하는 회원들이 많고 환자안내라도 거들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아 종국에는 99명이나 되는 인원이 길을 나섰다.

‘괜히 금산군의 밥값만 축내게 하는 것이 아닌가?’
금산군에 도착해 막상 진료를 시작하고 보니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연이어 몰려든 환자들로 40개의 진료대는 빌 사이가 없었다. 시술 경험이 많은 회원과 이제막 침뜸의 맛을 제대로 알기 시작한 회원이 짝을 이루어 환자를 치료했다.

침뜸술을 배우기 시작한 회원은 환자에게 뜸봉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고 주의해야 할 것을 일러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뜸사랑> 회원인 선생님을 따라온 6명의 경복여고 학생들도 성의를 다해 거동이 불편한 환자의 손을 잡고 진료대 앞까지 안내했다.

환자와 술자(術者)가 하나된 시간, 마음과 마음이 통해 참 의술이 이루어지던 자리는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있자니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물이 북받쳐 올라왔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자꾸 눈물이 솟아올랐다 남이 볼까 슬쩍 눈을 비비는 척하며 한쪽 구석으로 가서 눈물을 훔치며 마을을 가다듬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침뜸봉사 요청

2000년 '뜸사랑 봉사단'의 침뜸 무료진료 사진
9월1일과 2일, 이틀동안 <뜸사랑> 봉사단이 진료한 환자는 1800명이 넘었다. 99명의 봉사단원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움직이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환자들의 시선이 언제나 모두 곱지만은 않은게 사실이다. 무료보사를 많이 받아본 환자일수록 더 심드렁하고 더 까다로워서 처음에는 흔해 빠진 의료봉사쯤으로 여긴다.
‘흥! 한 번 생색내고 또 썰물처럼 빠져나가려고!’
그러나 <뜸사랑>의 침뜸 봉사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정성과 침뜸의 진가를 알고 변했다.

치료를 받고 나가면 ‘진짜 의사가 왔다’라며 여기저기 전화를 해 가족과 친척, 이웃을 부르기도 하였다.
지역방문 봉사활동은 그 후 에도 이어졌다. 2000년 11월에는 순천에서 지역 벤터기업인 (주)테인테크가 주선하고 여수 MBC와 순천시 후원으로 500여 명에게 침뜸 봉사를 했다.

금산인삼축제 침뜸 봉사를 계기로 뜸의 효능이 알려져 2001년에는 금산군의 요청으로 금산군 내 한 마을을 뜸시범 마을로 지정하여 정기적인 봉사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2002년 들어서는 부산 시민과 진주농민, 광주시민 등과 침뜸의 혜택을 나누어 가졌다. <뜸사랑>의 침뜸 효능에 대해 소문이 나 봉사활동을 나가면 매번 수백명의 환자들이 몰려왔다.

사람들이 모여들수록 봉사자는 흥이난다. 시간이 제한되어 모두 치료할 수 없을 때는 안타깝지만, 마음 한구석은 뿌듯하다. 아픈게 없어졌다고 좋아하는 환자들을 볼 때면 기운이 펄펄난다.

의료봉사단운 의료봉사를 나가기 시작한 1984년에 아내도 그랬다
“당신, 매일 이런 냄새 맡고 살았어요?”
“무슨 냄새”
“오랜 병에 제대로 씻지도 못한 병자들한테서 나는 냄새요!”
“허허.”
“그런데 참 이상해요. 몸에선 살비듬이 뚝뚝 떨어지고 다친 뼈가 튕겨 나와 있어도 아픈 게 나았다고 하면 그 환자가 왜 그렇게 이뻐 보여요?”

그해 5월 한 달 사이 광주 송원대학과 정부과천청사 두 곳에 침뜸 무료봉사실이 새로 문을 열었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뜸사랑> 상설 봉사실, 국회의원회관 내 상설 침뜸봉사실, 부산 동구 초량동의 봉사실까지 합해 다섯 곳의 봉사실을 <뜸사랑>이 운영하게 된 셈이다.

그 외에도 90년대부터 <뜸사랑>회원들이 주 1회 정도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을 나간 곳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정릉종합복지관, 관악청소년회관, 시흥 거목복지관, 유락복지관, 신당복지관, 약수복지관, 손기정기념관, 이천복지관, 신당성결교회, 안양 한마음선원, 부산한마음 선원, YMCA, 낙동복지관, 여수 지역의 복지관 등등 이들 복지기관의 대다수에서는 지금도 정기적인 침뜸 봉사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뜸사랑> 봉사단원들의 무료진료로 침뜸 시술을 받는 환자들이 연인원 5만여명이 넘어섰다.

 

#1백여명의 의사도 침뜸 공부에 매료

당시 내개 침술원에서 일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화·목요일 그리고 토·일요일 오전만이다. 나머지 월·수·금요일 그리고 토·일요일 오후는 봉사활동을 나간다. 틈만 나면 이곳저곳의 <뜸사랑> 봉사실을 다니고 광주·부산 등지의 봉사실로 나가 무료 시술을 한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쁘지만 침뜸 상설 봉사실<뜸사랑> 식구들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웃음이 나온다.

한때 침과 뜸의 맥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었다.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침뜸에 대한 세상인심이 하도 팍팍해 하루에도 몇 번 씩 만감이 교차하는 시정이 었다. 그러다 불현 듯 불안감의 근원이 제도가 아니라 사람에게 있음을 깨달았다.

침구사 제도가 만들어져도 사람이 없다면? 그렇다! 사람이 없다면 모두 헛것이 아닌가! 허나 이제 그런 두려움은 없다. 침뜸 교육사업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배출한 인원이 1천명을 넘어섰고, 2000년 시작한 의사 침뜸의학 세미나를 통해서는 100명을 웃도는 의사들이 침뜸을 익히게 됐다.
‘이제 내가 없어도 침과 뜸의 맥이 끊어지진 않겠구나! 언제가는 삼천리 방방곡곡에 침뜸의 꽃이 피어나 겠구나!’
침과 뜸은 비용이 거의 들지 않아 마음만 내면 얼마든지 시술해줄 수 있다. 그래서 상술이 되어버린 의술을 인술로 회복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이다.

아직도 이땅에는 제대로 딘 침구사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언제가는 국민을 위한 참 의료제도가 실현되고 침구사 제도도 바로 서고 침뜸의 맥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