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uality/神學

과연교회 안에 구원이 있을까?

天上 2015. 1. 13. 20:02

과연교회 안에 구원이 있을까?

 

최근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 호응을 얻고 있고, 일부 기독교인들까지 이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이 있게 된 것은 기독교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주장해 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로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것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를 고수했다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라고 수정한 것은 어디까지나 카톨릭이지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 본서에서 따로 언급이 없는 한 기독교는 개신교, 그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는 복음주의를 지칭하고 또 그런 믿음을 가진 자를 기독교인이라고 표현함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예수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라고 인정하거나, '과연 예수 안에 구원이 있을까'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간혹 예수를 믿는 신자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 영원을 알고 구원을 받은 자답지 않게 위선적이고 경건하지 못한 삶을 살아 '과연 교회 안에 구원이 있을까'라는 오해를 심어준 것은 사실입니다. 또 그런 일로 인해 교회 내부에서 자성의 소리가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사는 모습과 예수를 믿는 믿음의 본질을 혼동해선 안 됩니다. 성경의 예수님과 십자가에 드러난 영혼 구원의 진리는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가' 하는 문제는 전혀 심각한 현안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항상 심각한 문제로 등장했었고 지금도 등장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게 할까?'이지, '예수 안에 구원이 있을까'는 문제된 적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려 하는 것은 성경의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생각입니다. 저는 단지 무명의 한 목사에 불과합니다. 종교적·신학적 지식이 사계의 전문가들에 비하면 많이 부족함을 자인합니다. 33살이 되도록 소위 예수쟁이들을 죽도록 싫어했으며 완전한 불신자 가정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처녀 때부터 신자였던 아내를 결혼하면 같이 교회 나가겠노라 꼬셔서, 막상 결혼 한 후에는 입을 싹 닦고 아내를 교회 나가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내 눈앞에 성경이 보이기만 해봐라 당장 불질러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집안에서 성경도 못 보게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저에게 성경의 말씀이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다가온 뒤에는 그 말씀의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깊이와 넓이에 매료되어 목사까지 되었으며 앞으로도 평생을 다 바쳐서 말씀의 우물 안에서 헤엄치기로 한 사람입니다.

그런 예수는 없다

그러나 목사라고 해서 여러분을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로 직접 모셔갈 수 없습니다. 저 또한 스스로 그 정상에 올랐다고 자부하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평생을 바쳐 말씀을 상고해도 그 진리의 우물의 맨 밑바닥에도 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우물에서는 어느 깊이에서 물을 떠도 맛이 동일하듯이 성경을 벗어나지 않고 성령의 감화로 예수님을 조명하면 그분은 언제, 어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인식될 수 있습니다.

목사는 자기 사상이나 철학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을 해석할 때에 목사마다 보는 시각이 국지적인 면에서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성경 전체를 꿰뚫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컨텍스트(Context)에선 시대와 사람에 관계없이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는 하나의 주제로 귀결됩니다. 만약 이 주제를 벗어나면 성경을 목사가 기록하는 것이요, 더 나아가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결과가 됩니다. 비록 간혹 저 자신 부끄러울 정도로 무식이 드러나겠지만, 성경 속의 예수님은 저의 그런 해석과 상관없이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신 주님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간섭하심이 이 글을 쓰는 동안 저의 모든 부족한 점을 가려주셔서, 예수님의 영광을 사람이 더하거나 빼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인들은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산꼭대기에 올랐기에, 그 사람들의 말이 믿을 가치가 있는 진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어떤 코스를 택해 무슨 장비로 어떻게 올랐는지 경험담을 듣고 자기에게도 적용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정상에 섰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후세 사람들의 평가일 따름입니다. 그 평가도 도덕적·학문적인 측면에서만 한 시대를 풍미할 만한 새로운 사상을 제시했다는 것이지, 진정 그 본인이 정상에 올랐던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만약에 그 본인에게 죽기 직전 '당신은 정상에 올랐다고 확신합니까? 정말 당신이 이야기한 것들이 영원한 진리임을 믿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라고 확답하는 자가 과연 한 사람이라도 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성경보다 저명한 신학자의 말을 더 신뢰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두 가지뿐입니다. 자기의 학문적 유식을 자랑하고 싶은 치졸한 교만이거나 성경을 제대로 깊이 있게 읽어보지 않았다는 성경적 무식을 드러낸 것입니다. 물론 유명 신학자의 말을 무시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의 말은 성경을 해석하는 데 참고를 할 수 있을지언정 성경보다 우선하거나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신학자의 사상에 의해 자기 신앙이 좌우되어, 성경의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 없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성경을 수없이 읽어본 사람은 얼마든지 예수를 비평할 수 있으며 심지어 저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많이 읽는 것과 제대로 깊이 있게 읽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오해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비교종교학적으로 접근하면 당연히 깊이 있게 읽는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예수의 실체를 만나보거나 알아보려는 갈급함이 없이는 성경을 깊이 있게 읽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일대일의 관계에 들어가기를 소원하며 읽을 때는, 특별한 신학적 지식이 없어도 단 한 줄을 한 번만 읽어도 그 속에서 진리가 배어 나오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철저하게 자신을 더 깊이 감춥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11:25) 하나님이십니다.

20세기 서구 기독교 신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는 C. S. 루이스(Lewis)'기독교란 만일 그것이 거짓이라면 별로 대수롭지 않는 진술이고 진리라면 무한히 중요한 진술이다. 기독교는 어중간히 중요한 것일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을 아예 무시하거나 아니면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대로 따르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고 한 말이 미친 소리거나 정말 심각한 진리 둘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The Bible-the book이란 의미)은 아주 독특한 책입니다. 연구만을 위한 연구를 허용하지 않는 세상에서는 유일한 책입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는 성경을 연구하지만 '어린아이'는 성경을 믿습니다. 성경은 능히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딤후 3:15).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딤후 3:16)이므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감동에 의지할 때만 구원의 지혜에 이르게 하는 책입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 기독교가 활기를 되찾으려면 동양의 종교적·정신적 유산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감동만 있으면 됩니다. 능히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결코 기독교가 혼자서 활개치며 스스로 만족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른바 자기 것만 진리라고 하는 '종교적 제국주의'를 주장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웃 종교와의 관계에서 고려되지 않는 신학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자각은, 하나님에게 인정받기보다 자기 지혜를 자랑하여 사람들로부터 관용의 미덕을 베풀 줄 아는 도량 넓은 신학자라는 칭찬을 듣고 싶은 자에게만 필요합니다. 참신학자란 자기 집 뒷마당이나 파보고 지구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고 큰소리치는 지질학자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집 뒷마당이라도 제대로 파보고 자기 집 뒷마당이 정확하게 어떻게 생겼는지 전하는 자라야 참신학자입니다.

기독교적인 가정과 환경에서 자라 주일을 꼬박꼬박 지키며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기독교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사람 가운데도 하나님의 감동 없이 성경을 바라볼 때 크게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리와 기독교라는 종교체계가 산출해낸 모든 것들(기독교 메커니즘-mechanism)) 기독교라는 종교체계·가시적인 교회 조직·교단·교파·교리·신학자와 목회자와 교인 등, 모든 기독교 관련체계로서의 기독교와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진리로서의 기독교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함에도, 단순하게 전자를 기독교의 전부 내지 본질인 양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전자가 저지른 잘못으로 후자의 기독교마저 매도된다. 그래서 본서에서는 특별히 기독교라고 했을 때는 후자의 기독교를 의미하고, 전자의 경우에는 특히 그 잘못을 표현할 때에 적당한 단어가 없어 기독교 메커니즘이라고 표현했다.

과의 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둘을 동일시하거나 서로 혼동합니다. 심지어 후자가 기독교의 본질인 양 착각합니다. 기독교에 동양의 지혜가 필요하다든지 기독교에 드러난 종교적 제국주의·국지주의적 신학·부족신관 등을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성경을 본다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둘을 정확히 구별해서 전자를 후자에서 분리할 줄 아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만약 다시 이 땅에 오셨는데 이런 질문들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할 것 같습니까? "성경은 구원을 얻는 데 지혜가 부족하니 시대 조류를 참작하고 신학자들의 주장도 보완하고 동양의 지혜와 사상을 빌려와 성경을 수정·보완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종교적 제국주의를 이 땅에 실현하려고 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국지주의적 신학이나 부족신관을 주장한 적이 있습니까?" 틀림없이 전부 ""일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알파요 오메가요, 영원토록 변함없는 예수와 그분의 십자가 사건이며 그것은 성경에 너무나 완전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예수에 대한 전통적 교리를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신학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 또한 기독교가 새로운 바람이나 물결에 대처하고 변모하고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와 기독교 메커니즘이라는 이분법으로 이 문제를 접근하셔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는 없어지지 않고 변하지 않습니다. 시대와 조류에 따라 변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전세계 60억 명 중 오직 한 명만 성경의 진리를 믿는다 해도, 비록 기독교 메커니즘은 흔적 없이 사라졌을지라도 성경의 진리는 여전히 진리로 빛을 발합니다. 하나님은 단 한 사람이라도 그런 신령한 자를 찾고 있습니다. 설사 그런 자가 한 명도 남지 않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은 단 한치도 손상 받지 않습니다. 그때는 단지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기대와 사랑을 완전히 거두게 되는 것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믿고 있다면, 그 사람 개인의 사상적 자유에 속한 것이며 그 자유마저 탓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성경의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왕"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사람이 그 말을 믿지 못하면 그 둘 중에 누가 잘못이었는가는 둘째치고, 두 사람 사이에 진정한 관계가 형성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참신자라면 성경의 진리가 변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흔들리거나 놀라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을 안타깝고 불쌍하게 바라봅니다. 그들을 위해 성경의 예수님에 대해 더 잘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먼저 갖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신자가 성경을 읽을 때는 문자적인 해석을 절대 고집하지 않습니다. 원어의 뜻, 전체적 문맥, 저자의 의도, 당시의 사회적·문화적·역사적 배경, 문학적 표현기법, 상징적 영적 의미, 성경의 다른 책과의 관계, 성경을 일관하는 주제 등 모든 것을 고려 사항에 넣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라고 말한 것을 가지고, 기독교가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바울은 비유법과 대조법이라는 문학적 기법을 동원했기 때문에, 무엇과 무엇이 서로 비유 또는 대조되어 있는가를 정확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말씀의 앞 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을 폐하리라"(10), 따라오는 절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2)11절과 함께 대조해 봐야 합니다. 11절은 10절과 12절의 의미를 보충설명하기 위해 비유로 등장한 삽입절에 해당하며 이 문맥의 핵심 내용은 사실은 10절과 12절에 있습니다. '어린아이',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부분적'이 한 짝이고 '장성한 사람', '그때',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 '온전히'가 다른 한 짝입니다. '어린아이'는 신자가 이 땅에 있는 현재 상태이고 '장성한 사람'은 미래 천국에 가서 주님을 맞대면할 때를 말합니다. '버렸노라'가 과거시제처럼 보이지만, '버렸노라'10절의 '폐하리라'12절의 '볼 것이요', '알리라'와 같은 시제로서 원어적 의미로 장차 그렇게 되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과거에 가졌던 신앙의 성장체험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10절과 12절을 잘 설명하기 위해 비유로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을 대조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기독교 신앙이 과거에 유치했던 신앙상태-즉 기독교만이 진리라고 주장하고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서 생각하면 안 된다고 하는 종교제국주의적 사고-를 벗어나서, 다른 종교에서 취할 것은 취하고 서로 관용해서 정신적으로 끊임없이 장성해야 할 믿음의 상태로 자라라고 권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 이 땅에서 영생의 완전한 영광을 보지 못한 상태가 전부가 아니므로 미래에 가게 될 천국의 완전한 것을 소망하라고 권하는 말입니다.

바울 자신은 시대가 바뀜에 따라 기독교 진리를 새로운 사고로 접근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자기가 "부득불 자랑할 것"(고전 9:16)이라고는 복음뿐인데 그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1:2)으로 메시아가 와서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 된다는 데 있지, 기독교 진리가 변해야 한다고는 바울도, 성경도, 예수님도 말한 바가 전혀 없습니다.

기독교의 진리 안에는 유치한 것과 고급한 것의 구별이 없습니다. 사람과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라고 하여 모두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숙하고 건전한 믿음, 우리를 신나게 하는 믿음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기독교의 진리를 믿어 예수님 당신과의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유치하고 치졸한 믿음, 쓸데없이 우리를 속박하는 믿음은 기독교적 메커니즘에 일희일비하며 예수에 대해 학문적으로 분석하여 인간적 지혜와 슬기를 자랑하는 믿음입니다.

저는 이제 기독교 신앙이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형을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구조조정'을 해야 합니다. 그 구조조정은 작금 온갖 자기 신학을 뽐내는 종교학자들에게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감동은 전혀 없이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이성만으로 성경의 예수를 무시하고, 학문의 예수를 주장하는 또 다른 형태의 신념체계(Belief System)로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불신자들의 비평에 현혹되어 그들의 주장에 호응하거나 진리를 왜곡시켜선 안됩니다. 진리를 포기하면서 기독교와 예수님에 대한 비평을 잠재워보려는 시도는 단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그럴수록 저들의 비난은 더욱 거세어지고 하나를 타협하면 전부를 내놓으라는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대신에 단 한 명의 신령한 자라도 기독교 진리를 사수하려고 했을 때는 기독교가 구시대의 유물로 퇴락한 적은 절대 없습니다. 비록 순교자는 나왔을지라도 말입니다. 기독교 메커니즘에서 불순물을 제거하여 더욱 성경의 예수님으로 돌아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하는 구조조정이며 그것이 우리를 살리고 신나게 하는 믿음입니다.

저는 이 성경의 진리를 일반적 용어와 비유로 최대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야말로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가장 많이 가졌던 자라 꼴보기 싫은 구석을 얼마든지 지적해낼 수 있었고, 어떤 면에서는 지금도 어느 불신자보다 더 불신자적인 시각으로 기독교를 볼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그 잘못들은 어디까지나 기독교 메커니즘의 문제이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자는 없었습니다. 성경은 저 같은 자가 거꾸로 읽어도 그 속에는 영원한 예수가 살아 있습니다. 유치하지 않으면서 일반인도 쉽게 알 수 있는 신학적인 내용이 포함되어지길 원합니다. 제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중에도 성령의 완전하신 인도하심을 받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공히 성령으로 예수를 알고, 성령으로 예수를 만나며, 성령으로 예수를 전하고, 성령으로 예수를 받아들이는 역사가 있기를 말입니다.

500년 전 마르틴 루터가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다는 '만민 제사장직'을 주장하였는데, 현대에는 일반인들도 신학에 어느 정도 조예를 가져야 하고 또 가질 수 있다는 '만민 신학자직'을 주장하는데 참으로 공감합니다. 신자들이 오도된 신학에 휩쓸려 방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바른 신학을 공부해야 합니다. 바른 신학이란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첨단(?) 유행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성경을 풀어 말씀하시는 신학을 말합니다. 교회마다 평신도들이 요한복음¡¤·I¸¶¼­¡¤°¥¶oμð¾Æ¼­, 또는 창세기·출애굽기·욥기·이사야서 같은 책들이 정말 자구·장·절 하나 빠짐없이 읽어지고 연구되어져야 하고, 강단에서도 인격적인 훈화나 시류에 편승하는 관념적인 사상을 논할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가 전했던 바로 그 복음이 다시 확실하게 선포되어져야 합니다.

평신도들이 신학을 알아야 한다니까 유명 학자들의 조직신학 책부터 보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성경을 읽고 또 읽어 하나님의 감동으로 성경 전체를 연결하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찾아내고, 이를 신학적 바탕 위에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합니다. 신학이 성경보다 우선하거나 대체할 수는 절대 없습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이 말한 대로 '알기 위해 믿는 것이지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신자들에게, 왜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를 물어보면 다들 분명하고도 체계적인 대답을 잘하지 못합니다. '그저 믿어져서', '예수님이 좋아서', '그분이 찾아와서', 심지어 '어쩌다 보니' 등등입니다.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해서 기독교인들이 다들 멍청하고 맹신적·미신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기 위해선 일차적으로 영적 접근을 요구하지 신학적 접근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또 이렇게 믿은 믿음을 신학으로 걸러내고 변경하고 타협하고 굴절시키거나 취소시킬 수 없습니다.

평신도가 신학을 해야 하는 이유는 베드로 사도가 말한 대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벧전 3:15)하기 위한 것입니다. 첫째는 자신의 영적 소망을 부단히 키우고 그리스도를 항상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둘째는 다른 사람에게 그 소망을 체계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저는 나이 33살이나 되어 처음 예수를 믿은 이후, 성경 말씀이 너무 오묘해 어떻게 하면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을까 하는 갈급함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습니다. 목사가 된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 때문이지만 제 자신 쪽에서 구태여 이유를 찾자면 오직 이 말씀을 더 공부해보고자 하는 소원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평생을 바쳐 성경만 파헤친다 해도 바닷가의 그 무수한 모래 중에 몇 알 집어든 정도 밖에 되지 않겠지만, 바르게 캐낸 한 알만으로도 우리 인생과 사회와 역사를 바꿀 만큼 고귀하고 능력이 넘친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그 모래 캐내는 일에 제 인생을 바치기로 한 것입니다.

어떤 불신자가 일견 타당해 보이는 이런 질문을 제게 한 적이 있습니다. "왜 기독교 목사들은 일반적인 문학·교양·철학·사상 책은 잘 안 보고 기독교 관련 책만 보느냐? 서가에 꽂힌 책들을 봐도 거의 전부 성경이야기뿐인데 좀 넓고 해박한 지식으로 설교를 하면 더 나을 것 아닌가?" 성경말씀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에게 솔직하게 설명하면 자칫 교만으로 비칠까 싶어 웃고 말았지만, 내 속으로는 "평생을 두고도 성경도 제대로 다 보지 못하는데 사실 그런 책들을 볼 여유가 없습니다."는 확실한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대로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고후 10:5) 하는 일이 가장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나 그분에게 일생을 바치기로 한 자들에게는 예수 외의 이야기는 별반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오해는 하지 마셔야 할 것이 일반 사상과 철학이 가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지적 요구·도덕적 권면¡¤A¾±³Au CE¿a´A Aæ´cCOAo ¸o¶oμ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고 이 땅에서 천국을 실현하는 데는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목사가 할 일은 신자들의 도덕·사상·종교 교육이 아니라 오직 신자들의 영혼을 하나님께 안고 들어가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도 알게 해주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일진대 하나님은 이미 그 목적을 필요·충분하게 달성할 수 있는 성경을 주셨기 때문에 다른 책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다른 어떤 책보다 성경을 읽습니다. 기도하면서 읽습니다. 읽기 전에 기도하고 읽고 난 후에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의미를 풀어 쓴 기독교 관련 책들만 읽습니다. 저에게는 유명 사상가·철학가·종교가의 책보다도 우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책을 읽는 목적은 절대로 지적인 황홀감을 맛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태여 표현하자면 영적인 황홀감을 맛보고자 합니다. 정말 주님이 제 곁에서 함께 울고 웃고 있음을 확실히 체험해가며 읽습니다. 때로는 저보다 그분이 먼저 한숨쉬고 눈물 흘릴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제가 웃으면 따라 웃을 때도 있습니다. 비록 그 책들의 저자는 인간일지라도 책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살아 있는 것을 분명히 듣고 느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으며 묵상하다 보면 인간 저자는 어느덧 사라지고 살아 계신 주님이 제게 다가옵니다.

과학과 상관없이 믿는 것은 미신이요, 이성의 동의 없이 믿는 것은 맹신이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여기에 하나 더 보태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감동 없이,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의 조명 없이 믿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지금 말씀하고 있다는 확고한 인식을 갖고 받아들여진 말씀이 있어야 하고, 또 그 받은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의 전 일생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고매한 사상·철학·종교일지라도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과 대체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을 정말 점검해 보아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성경 말씀은 붙들지 않고 현대 신학자의 사상을 먼저 참고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면, 그 사상이 아무리 타당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마르틴 루터가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일으킨 종교개혁의 또 다른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고자 하는 말씀이 어느 특정 개인이나 종파를 비판하거나 단순히 슬기로운 종교인 내지 신앙인이 되자는 뜻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삶에의 탐구가 좀더 확실하고도 튼튼한 성경의 기반 위에 세워짐으로써 하나님 보시기에 더욱 아름다운 자녀가 되어지기를 바라는 오직 한 가지 염원만 그 속에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판단은 언제나 여러분 각자의 몫이란 점을 분명히 해두는 바입니다. 단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 부족한 글을 단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감동으로 읽어주는 분이 있다면 그것으로 저는 만족할 따름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예수님의 도덕적·사상적 가르침을 따른다고 해서 자유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르침을 제대로 따를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 당신만이 진리입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예수님이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미국 LA. 우거(eOEU)에서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