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술을 40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으로 가르친다
어느 블로그에서 나로서는 기가 막히는 글을 하나 접하게 되었다. 그 글을 그대로 인용한다.
법륜스님 10초 답변, 박수 터진 까닭
오랜만에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현장 이야기 전합니다. 어제 저녁,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정토회에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강연을 들으러 갔습니다. Daum 아고라 청춘콘서트 특별 페이지에 올라가는 법륜스님 동영상 강연을 매주 빠지지 않고 챙겨보고 있지만, 직접 현장에서 듣는 것은 더욱 생생하고 역동적이었습니다.
여러 질문들이 솓아졌지만 대부분 답변이 길어서 블로그라는 한정된 공간에 다 전해드릴 수는 없겠네요. 그 중 아주 짧고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질문과 대답 한 가지를 소개해 들릴께요. 지금껏 들어 본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중에서 가장 짧은 답변이었습니다. 10분 정도 질문한 것 같은데 답변은 10초였습니다. 아주 쿨했습니다.
질문자(여자):
자아에 대한 질문입니다. 무상한 사물은 변과 화를 통해서 연기적으로 존재합니다.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저 자신도 길가의 풀 한 포기 돌 하나처럼 특별히 '나'라는 에고가 자리합니다. 사람의 정신은 '나'라는 자아가 있는 게 아니라 자아의 작용만 있다 하셨습니다. 객관적으로 제 몸의 '나'나 스님 몸의 '나'가 느끼는 자아는 각자 하나씩이지 않습니까. 제각각 입장에서 그것은 또 각기 단 하나의 자아만을 장악할 뿐입니다. 모든 것을 내 작용의 자아를 통해 봅니다. 내 자아가 다른 것의 자아와 다름을 인식할 땐 무섭도록 절대적 고독을 느끼게 되고 심지어 존재에 대해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사후의 세계야 제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떨 땐 제가 너무 낯설고 꿈은 아닌지 혼란스럽습니다. 잠들거나 기절하면 사라졌던 자아가 깨어나서 또 하루의 인연을 이어갑니다. 크게 보면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겠죠. 삶이 정녕 꿈일까요? 꿈이라면 태어남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요. 불법에 초보자인 저의 무명을 일깨워주십시오.
(제가 질문 내용을 짧게 압축적으로 다듬어서 그렇지 실제 질문 내용은 이것보다 더 길었습니다. 시간 계산을 대략 해보니 10분 정도 질문한 것 같네요.)
법륜스님: 아침밥 먹었어요?
(스님은 대답은 하지 않고 갑자기 아침밥을 먹었냐고 묻자 청중들이 크게 웃었습니다.)
질문자: 먹었습니다.
법륜스님: 지금 살아 있어요?
질문자: 예, 살아 있습니다.
법륜스님: 그럼 됐어요. 쓸데없는 생각 좀 그만 하세요. (청중들은 하하하 웃음) 그것은 불교가 아니에요. 그런 불교를 자꾸 하면 머리만 아프고 인생이 피곤해져요.
질문자: (환하게 웃음)
법륜스님: 그러니까 번뇌다 이 말이에요. 번뇌는 놔버리는 것이에요. 번뇌는 답을 찾는 게 아니에요. 가만히 들어보니 그럴 듯한 얘기로 포장을 해서 꿈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요.
질문자: 알겠습니다.
답변은 10초를 넘기지 않았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질문자는 그 자리에서 이해를 하고 밝은 웃음을 보이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청중들은 큰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제가 지금껏 들어본 법륜스님의 답변 중에서 가장 짧았습니다. 처음에는 질문 자체가 이해가 안 되는 저 어려운 내용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할까 걱정도 되고 가슴도 답답했는데, 스님이 "번뇌다" 하는 순간 가슴이 뻥 뚫리면서 큰 웃음이 터졌습니다. 물론 질문하신 분의 근심어린 얼굴도 스님의 답변을 듣자 그 자리에서 바로 환하게 바뀌었습니다. 질문한 자의 고뇌를 문답을 통해서 그 자리에서 바로 해결한다는 즉문즉설의 묘미를 제대로 느낀 순간이었네요.
위의 글에서 질문자가 법륜스님에게 참으로 난해한 말들을 늘어 놓으면서 불법의 초보자인 자신의 무명을 일깨워 줄 것을 주문한다. 불교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위의 질문자처럼 자신도 알 수 없는 현학적인 말들을 함으로써 그럴 듯하게 보이려고 애를 쓴다. 특히 스님들이 대중들에게 설법을 할 때 그럴 듯한 얘기로 포장하여 꿈같은 소리들을 곧잘 한다. 그래야 그럴 듯하게 보이고 스님으로서의 권위가 선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글을 읽으면서 웃음도 나왔지만, 침술을 한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의 글 질문자와 똑 같은 경우의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왜냐하면 침술을 40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으로 가르친다는 <침술개인지도 안내문>을 보고 여렵고 복잡한 침술을 어떻게 짧은 시간으로 배울 수 있느냐고 종종 시비조로 문의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침술은 음양오행적인 사고방식에다 오묘하고 영험스러운 이치나 원리가 숨겨져 있는 신비의 의술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래서 침술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음양오행의 원리를 통달해야 하며 음양오행의 원리를 통달하지 않고서는 침술이 질병을 치료하는 신비스러운 이치를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자잘한 인간들이 침술의 신비에 대해서 감히 논할 수조차 없다고 했다.
옛날 사람들은 침술을 그럴 듯한 음양오행의 이론으로 포장을 했고 음양오행을 익힌다는 자체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워 막연하기만 한 것이다.
아직까지도 침술을 가르치는 많은 선생들이 음양오행의 이론으로 지도를 하며, 심지어는 점을 치는 역술을 침술에 접목시켜 가르치는 선생도 있다. 그래서 침술은 어렵고 혼란스럽기만 한 것이다. 더구나 침술의 이론들은 모두가 그럴 듯한 얘기로 포장된 꿈같은 이론일 뿐이다.
침술은 침을 몸의 여기저기에 꽂아서 자극하는 원시적인 의술이면서 대단히 과학적으로 작용하는 의술이다. 침술이 음양오행적으로 오묘하고 신비스럽게 작용하여 질병을 낫게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평생을 헤매야만 한다. 쓸데없는 이론으로 침술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침술의 메커니즘을 음양오행이 아닌 생물학적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으며, 생물학적인 근거에 의해 침술을 적용해야 치료의 효과가 정확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침술은 과학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어딘가가 고장이 났을 때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장치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장치가 잘 동작하지 않을 때 외부에서 스파크를 일으키듯이 자극을 가해주면 동작하지 않던 치유장치가 덜커덕 시동이 걸리면서 원활하게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외부에서 스파크를 일으키듯이 자극을 가해주는 것이 바로 침술이다. 자극을 가할 때 어떤 기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기법만 익히면 침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침술을 장기간 공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침을 몸의 여기저기에 꽂아서 자극하는 방법만을 익히면 되는 것이다. 쓸데없는 이론을 익히고 그럴 듯한 음양오행의 지식을 익히는 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그런 침술을 자꾸 하면 침술이 더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지고 치료 효과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침술은 막연한 신비의 대상이 아니라 확연한 과학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침술은 과학적으로 접근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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