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가톨릭교회에서는 미사 때 유대주의와 이교도적인 요소가 가미된 의식 행위로서, 예컨대 사제들의 화려한 복장, 의식용 향과 성수, 울리는 종, 불타는 촛대, 각종 십자가 등을 사용한다. 한편, 국내의 개신교에서는 가톨릭교회와는 달리, 기독교가 국내의 무속 신앙과 불교 그리고 유교가 혼합되어 있다. 국내 기독교의 이러한 모습에 대해, 장로교 소속 서재생 목사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앙 행태를 보면, 생각은 불교적으로 하고 생활은 유교적으로 살고 신앙은 무속(샤먼)적으로 믿고 있는데, 샤머니즘이 한국 기독교를 병들게 하고 혼탁하게 하고 있는데 이것은 실로 중대한 일이다"고 했다(<목사님도 모르는 교회 안에 무속 신앙>, 서재생, 도서출판 세줄, 14쪽).

이러한 기독교의 무속 신앙과 불교와 유교의 융합적인 행태는, 예를 들면 추도 예배·성미(誠米) 제도·삼우제·49재·100일 기도회·새벽 예불·통성기도·철야 기도 등에 나타나 있다. 이 외에도 한국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비성경적인 행태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한 실례에 있어, 합동신학대학원 김영재 교수는 그의 책에서 "국내 개신교회들이 예배를 시작하면서 종을 치고 묵도함으로 예배를 시작하는 것은 한국교회에서만 보는 특이한 것이다. 예배에서 헌금한 사람들의 이름을 광고하거나 목사가 십일조나 감사 헌금을 드린 사람의 복을 빌어 주는 것은 한국교회 이외의 교회에서는 볼 수 없는 희한한 광경이다. 주보에 헌금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재하는 것도 한국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풍습으로 전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그리고 강단을 많은 돈을 들여 화려하게 꽃으로 장식하는 일 역시 한국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것이다. 꽃꽂이의 기법이 불교 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도 고려할 점이라고 하지만, 강단을 많은 돈을 들여 꽃으로 장식하는 일 자체가 개혁주의 전통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또 강단 안쪽 벽에 걸린 휘장은 한국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은 구약시대의 성전의 휘장을 연상케 한다(<교회와 예배>, 김영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54~56쪽). 상술한 것처럼 한국교회는 성경적인 기독교가 아닌 비성경적인 희한하고 특이한 요소를 많이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여기서는 국내 지역 교회 내에서 행하고 있는 여러 행태 가운데, 비성경적인 새벽 기도회와 철야 기도회 그리고 통성기도와 '주여 삼창'에 대해 어떤 점들이 비성경적인지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먼저, 비성경적인 새벽 기도회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신약성경에 나오는 지역 교회의 집회에 대해 알아보자.

신약성경은 지역 교회의 7가지 집회들에 대하여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그 가운데 4가지는 정기적인 형태의 집회로서, 즉 만찬 집회(고전 11:23, 행20:7), 말씀 집회(고전 14장, 행 11:26), 복음 집회(행 13:42~49, 살전 1:8), 기도 집회(행 2:42, 12:5)이며, 나머지 3가지는 비정기적인 형태의 집회인, 장로 집회(행 20:17~38), 선교 보고 집회(행 14:26~28), 징계 집회(고전 5:3~5)로 나타나 있다.

이처럼 신약성경에는 지역 교회에 7가지 종류의 집회 형태가 나타나 있으므로, 신자들은 이러한 성경의 모본을 따라 집회를 갖는 것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모임의 진리>, Norman Crawford, 기둥과 터, 39쪽 / < 이미 있는 진리를 생각하라>, 한스 바우만, 전도출판사, 29쪽)).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온갖 비성경적인 집회가 난무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역 교회에서 공적인 집회로 모임을 가질 때는 그 집회가 성경에 근거하는 집회인지 아닌지를 잘 분별해야 할 것이다.

국내의 침례교회는 성경적 근거를 중시하는데, 그들은 "성경을 모든 신앙의 중심에 두고 성경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결코 성경과 같은 권위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장 상황에서 유용한 것이라도 반드시 성경적 근거가 있는가를 검증하는 것이 전통이다(<한국 침례교의 신학적 특성>, 침례신학대학교, 354쪽)"고 말한다.

이처럼 침례교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개신교회와 거듭난 신자들도 성경적 근거를 중시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성경과 동떨어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를테면 국내의 개신교회는 서두 부문에 언급한 비성경적인 여러 실례들을 실제로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국내 대부분의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새벽 기도회에 대해 무엇이 비성경적인지에 대해 알아보자.

과거, 국내에서 처음 기독교를 접한 사람들 중에는 개종하기 전에 토착 종교의 수행을 통해 토착 신앙의 종교 체험을 한 경우가 많았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고 길선주 목사인데 그가 새벽 기도회를 시작하고 확산시킨 장본인이다. 김경진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는 그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한국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평양 대부흥운동 때 길선주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밝혔다(<묻고 답하는 예배학 Cafe>, 조기연, 대한기독교서회, 123쪽).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선도(도교)를 수행하였고 개종 후에도 선도식 수행을 계속했다. 특히 새벽 기도를 하고 선도식 체조를 했는데, 이러한 그의 새벽 기도는 토속 신앙인 선도식 기도였다(<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이덕주,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84쪽 / <초기 한국 기독교사 연구>, 이덕주, 99쪽). 길선주는 개종 후에도 토속 신앙의 수행 방법인 새벽 기도를 기독교에도 적용하고 실행했다. 그는 1906년 가을,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개인적으로 하던 새벽 기도에, 그의 친구인 박치록이 함께 동참했고 한 달 후에는 전 교인이 공식적으로 새벽 기도회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새벽 기도회가, 소위 1907년 평양 대 부흥 운동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한국교회의 정기적인 집회로 자리 잡으며 오늘에까지 이어져 내려왔다(<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207, 348쪽). 한국교회의 새벽 기도회의 기원은 이렇게 비성경적인 한국교회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은 성경의 교리와는 무관하며 사람의 계명인 전통을 교훈으로 삼아 성경의 교리보다 앞세우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처럼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막 7:9)"에 해당하는 것이다.

한편, 전반부에 언급했듯이 신자들이 정기적인 형태의 기도 집회(행 2:42, 12:5) 시에 공적으로 모이는 것은 성경적이다. 그리고 공적인 기도 집회 외에 개인적으로 혼자서 기도하는 것 역시 성경적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 6:6)"고 말씀했다. 또 마가복음에 나오는 말씀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와 같이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한적한 곳에서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공간에서 행하는 기도는 올바른 신앙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오늘날 새벽 기도회의 성경적인 근거를 마가복음에 나오는 말씀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에 두고 있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이 구절을 예수님이 새벽 기도를 창시한 본문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한국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 101가지 성경이야기>, 윤석준, 부흥과개혁사, 372쪽). 이것은 성경 말씀을 왜곡한 것으로서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자기네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또 교인들을 다른 곳에 한 눈을 팔지 못하도록 하고 교회에 붙들어 놓으려는 전략이다"고 침례교 조엘박 목사는 그의 책에서 언급했다(<한국교회 이렇게 달라져야 한다>, 조엘박, 박스북스, 132~135쪽).

이처럼 그릇된 목사들이 비성경적인 새벽 기도회에 대해, 자기네 교인들에게 엉터리로 가르치며 세뇌시켜 왔다. 이를테면, 교인들은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전이 없는 곳에서는 정상적인 예배나 기도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기면 예배당에 가서 기도하곤 하는데, 그들은 집에서 기도하는 것은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평신도 교회 이야기>, 최승호, 대장간, 21쪽). 그리하여 목사들은 시도 때도 없이 자기네 교인들에게 예배당을 구약시대의 성전처럼 여기며 신성시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배당은 성전도 교회도 아니며,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성전이며 교회인 것이다(고전 3:16, 1:2).

상술했듯이, 새벽 기도와 새벽 기도회는 엄연히 다르다. 새벽 기도는 말 그대로 새벽에 하는 개인적인 기도이다. 그러나 새벽 기도회는 교인들이 함께 모이는 공적인 집회이다. 국내 개신교의 새벽 기도회는 매일 새벽 4~5시경에 모이는 공식적인 모임이다. 이러한 집회는 길선주 목사와 성경을 왜곡한 그릇된 목사들에 의해 생겨난 비성경적인 집회임을 살펴보았다. 국내의 적지 않은 중·대형 교회들이 40일 특별 새벽 기도회니, 21일 새벽 기도회니, 봄·가을맞이 특별 새벽 기도회니 하며 전교인들을 동원시키고 있다. 이것은 정말 교인들이 기도해야 한다는 의도보다는 자기네 교회를 유지하고 성장시키기 위한 술책에 불과한 것이다. 전 세계에 새벽 기도회가 있는 교회는 한국교회뿐이다(<한국교회 이렇게 달라져야 한다>, 136쪽).

다음, 비성경적인 철야 기도회에 대해 살펴보자.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금요 기도회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1970년대에 여의도순복음교회가 금요 철야 기도회를 시작한 뒤로 다른 교회들이 이를 따라 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한국교회에 하나의 집회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따라서 금요 기도회도 한국교회의 독창적인 집회라고 할 수 있다(<묻고 답하는 예배학 Cafe>, 조기연, 대한기독교서회, 130쪽). 오늘날 국내 교회는 금요일 밤에 철야 기도회를 갖는데, 대개 찬양에 이어 목사의 말씀 그리고 이어지는 통성기도의 시간에는 울고불고하며 요란하게 기도한다. 주변의 땅값이 다 떨어질 정도로 몸을 흔들면서 울어 대는 모습이 금요 기도회의 특징이다.

비신자들은 이런 교인들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무슨 죄를 많이 졌다고 울고불고 하나, 무슨 억울한 일이 많아서 악을 쓰고 우나, 저러다가 죽는 게 아닌가 하고 놀라 자빠진다. 금요 기도회 역시 강제적으로 참석을 강요한다. 무슨 사정이 있어 참석을 못하면 기도하지 않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혀 버린다. 아무리 피곤해도 금요 기도회에 나와서 기도해야 믿음이 좋은 사람이고 영적인 충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휴식을 얻어야 할 사람에게 금요 기도회에 나와서 휴식을 얻으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다(<한국교회 이렇게 달라져야 한다>, 139쪽). 상술한 것처럼 금요 철야 기도회도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비성경적인 집회로서 한국에서 최초로 생겨난 인위적인 집회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비성경적인 집단적 통성기도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의 토속 신앙에서 전래한 새벽 기도회와 같은 '통성기도'에 대해 교회사가 이덕주 교수(감신대)는 통성기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통성기도는 신앙인들의 집단적 신앙 표현 양식으로서 불교와 민간신앙에서 실천하는 독경 혹은 독송의 기독교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통성기도는 한국적 상황에서 자생적으로 창출된 토착적 신앙 형태였다(<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353쪽).

통성기도는 외국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식 기도'라고 부를 정도로 한국 개신교회의 특징적인 기도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통성기도는 1907년 길선주 목사의 평양 대 부흥 운동 때 시작됐다. 통성기도는 묵상기도와 달리 소리를 내서 각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통성기도에는 울며 부르짖는다는 느낌이 있다. 당시 교회사를 보면 "통성기도 소리가 마치 상가의 곡성(哭聲) 같았다"는 표현도 남아 있다(<동아일보> 칼럼, 2011. 3. 5).

장로교 이광호 목사는 한국식 통성기도에 대해 "무분별한 자의적 통성기도는 신학적인 분명한 검증을 거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에 보편화되어 있는 통성기도는 아무런 문제시되지 않고 있다. 통성기도는 과거 기독교 역사 가운데 없었으며 건전한 교회들에 존재하지 않는 양상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합심해서 기도한 것은 한국식 통성기도와는 다르다"고 했다. 또 한국교회는 큰 소리로 통성기도를 하는 것이 신앙을 나타내는 표현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외쳐 대는 것을 진정한 기도라 말할 수 없다. 상술한 바와 같이 한국교회의 집단적 통성기도도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비성경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비성경적인 '주여 삼창'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교회에서 '주여 삼창'은 이전에 기도원 집회나 부흥회 때 사용되던 것이 요즘에는 거의 모든 교회들이 통성기도 시에 '주여 삼창'하고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총회 법규집에는 '주여 삼창'에 대해 "이러한 기도의 형태는 전적으로 한국적인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과연 이 말의 출처는 어디일까? 사실 성경적인 근거를 확실히 댈 수도 없는 말이다. 성경에서 '주여 삼창'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시편의 기록이나 선지서에 나타나는 부르짖음을 예로 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어디에도 삼창을 해야 하거나 삼창을 하고 기도하는 곳은 없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주여 삼창'은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가? 그것은 인간의 답답한 마음을 표현하거나 멀리 있는 분을 부르기 위해서 소리를 지르는 방편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굳이 삼창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도 그렇다. 만일 이렇게 인간의 답답한 심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사용한다면 하나님을 분풀이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기에 오히려 외람된 자세가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듣지 못하실 것 같아서 사용한다면 조용히 기도하는 것은 들으시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동시에 동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다분히 무속적인 의미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속적인 신앙은 중보자(Shaman)가 신을 부르는 강신(降神), 초신(初神), 초혼(招魂)을 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신을 절규하듯 부른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격의 하나님, 스스로 계시하셔서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인격적 응답에 대해서 들으시고, 반대로 인간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사랑하시는 자를 살피시기에 먼저 다가오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성경은 교시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주여 삼창'은 기도의 대중적인 분위기 조성이나 호소력의 강조점이 있다고 하면 이는 부당한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로도 '주여 삼창'을 기계적으로 사용한다든지 혹은 의례적으로 사용하는 것 그리고 분위기를 잡기 위해서나 공예배에서 사용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총회 법규집> : 교회생활바른용어집). 상술한 것처럼 교회의 공적인 집회에서 '주여 삼창'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비성경적인 것이므로 삼가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국내 개신교회의 새벽 기도회와 철야 기도회 그리고 통성기도와 '주여 삼창'에 대해 비성경적인 여러 면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비성경적인 집회와 행태들은 모두 다 성경적인 근거가 없으며, 한국교회 자체 내에서 만들어진 인위적인 것들로서 전 세계에서 한국교회뿐이다. 요즘에는 한국교회의 새벽 기도회와 금요 철야 기도회의 명칭이 새벽 예배와 금요 예배 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헌법에는 새벽 예배와 금요 예배가 아닌 새벽 기도회와 철야 기도회로 명시되어 있다(<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헌법>, 한국장로회출판사, 362~364쪽).

그러나 상술에 능한 삯꾼 목사들은 교회 헌법도 무시하며 기도회를 예배로 바꾸어 교회 주보에 올려놓았다. 그들은 교회의 정기 집회를 기도회보다는 예배로 바꾸어 놓아야 교인들의 집회 참석률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삯꾼 목사들은 자기네 교회를 유지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어쨌든 기독교인들은 새벽 기도회와 철야 기도회 그리고 통성기도와 '주여 삼창' 등 이러한 집회들과 행태들은 비성경적임을 올바로 인식하고, 더 이상 그릇된 삯꾼 목사들의 술책과 농간에 속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이다.

권영문 (kymn6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