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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나를 거스르지 말라, 죽음뿐이니라"

天上 2018. 8. 29. 09:25
[박종인의 땅의 歷史] "나를 거스르지 말라, 죽음뿐이니라"
조선일보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2018.8.29
박종인의 땅의 歷史
절대 폭군 연산군의 막장 정치
지하 1000m 막장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분들께는 송구한 표현이지만 연산군은 그냥, 막장이다. 영민한 머리는 국가와 공동체 대신 스스로를 위해 굴렸다. 노력 없이 물려받은 권력은 욕망을 채우는 데에만 썼다. 기준은 하나였다. '陵上之風(능상지풍)', 왕을 업신여기는 풍토를 없앤다. 절대다수가 아니라고 할 때 그는 귀를 닫았고, 폭력으로 그들 입을 틀어막았다. 500년 전 조선왕조 10대 군주 연산군 이융(李)이 한 행적을 본다.

1482년 가을 창덕궁
1482년 한가위 다음 날 성종의 첫 왕비 윤씨가 사약을 먹고 죽었다. 질투심에 눈이 멀었다는 죄목으로 폐비 된 여자였다. 처형을 집행하기 전, 성종이 창덕궁 선정전에서 대신들에게 최종 의견을 물었다. 정창손, 한명회, 심회, 윤필상, 이파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 죽여야 한다고 했다. 이에 성종이 좌승지 이세좌에게 윤씨 집으로 가서 사사(賜死)하라 명했다. 이세좌가 내의(內醫) 송흠에게 물으니 "비상이 가장 좋은 독약"이라고 했다. 정7품 당하관 권주가 비상을 가져왔다. 이세좌와 권주가 윤씨 집으로 가서 윤씨를 죽였다.(1482년 8월 16일 '성종실록') 승지 이세좌가 집으로 돌아와 부인 한산 조씨에게 일을 이야기했다. 부인이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며 탄식했다. "우리 자손은 씨도 남지 않겠구나(吾子孫其無遺類乎)."(이희, '송와잡설·松窩雜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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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 묘. 맨 뒤쪽 왼편에 있는 무덤이 연산군 무덤이다. 연산군이 죽고 6년 뒤 아내 거창 신씨가 중종에게 애원해 유배지이자 그가 묻혔던 강화도 교동에서 이장했다. 오른편은 신씨 무덤이다. 가운데는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 묘, 사진 바깥 편 앞에는 연산군 딸 부부가 묻혀 있다. /박종인 기자

1504년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은 이날 등장한 인물들을 전원 처형했다. 비상을 추천한 송흠도, 심부름꾼 권주도 죽였다. 산 자는 조각내 죽였고 죽은 자는 관을 부수고 시체를 조각냈다. 뼈는 갈아서 강에 날려보냈다. 문득 사람들은 죽음이 조석간에 있음을 알았다(人皆自分死在朝夕).(1506년 9월 2일 '연산군일기')

10년을 계획한 광란(狂亂)
사람들은 말한다. 뒤늦게 자기 엄마 죽음의 비밀을 안 연산군이 폭군이 됐다고. 아니다. 왕이 된 지 석 달 만인 1495년 3월 16일 연산군이 승정원에게 이리 물었다.

"성종 임금 묘지문에 있는 윤기견(尹起畎)이라는 자는 어떤 사람이냐? 혹시 윤호(尹壕)를 잘못 쓴 것이 아니냐?" "폐비 윤씨 아버지인데,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연산군은 이때 어머니 윤씨의 죽음을 알았다. 연산군은 승정원에 보관된 윤씨 폐비 및 장례 관련 서류를 열람한 뒤 이에 대해 '다시 묻지 않았다.'(1495년 4월 11일 '연산군일기')

1504년 10년 동안 숙성된 광기가 폭발했다.
그 전해 9월 한 술자리에서 예조판서가 연산군 소매에 술을 쏟았다. 연산군은 예조판서를 전라도 무안으로 유배 보낸 뒤 이듬해 3월 사면시켰다. 궁으로 복귀한 그에게 술을 따르며 연산군이 말했다. "네가 전일 기울여 쏟은 것이다." 그가 감사하여 울었다.(1504년 3월 3일 '연산군일기')

죽다 살아난 이 예조판서가 바로 윤씨에게 사약을 가져갔던 승지 이세좌다.

일주일 뒤 이세좌는 또 유배형을 당했다. 영월로,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지가 획획 바뀌다가 한성 성문 밖에서 장형을 당했다. 연산군이 이렇게 그를 놀린다. "내가 형장 때리는 것이 그른 줄 안다(予知決杖之爲非). 그러나 불공(不恭)한 자가 있는 것이 모두 네 탓이므로(皆由於汝) 죄를 주는 것이다." 이세좌는 그달 말 사약형을 선고받고(賜死) 4월 4일 자살했다.

5월 2일 의금부가 죽은 이세좌 머리를 잘라와 거리에 내걸었다. 9일 이세좌 동생 이세걸과 이름이 같았던 사관(史官) 이세걸을 이충순으로 개명시켰다. 6월 20일 이세좌 집을 부수고 연못으로 만들었다. 친인척 집도 다 헐었다. 일주일 뒤 이세좌가 재임 시절 만든 법을 모두 폐지시켰다. 다섯 달 뒤인 11월 24일 이세좌가 뽑은 과거 합격생을 전원 탈락시켰다. 계획된 사면이고 계획된 고문이었다.

그사이에 연산군은 성종의 후궁인 성씨와 엄씨를 때려죽였다. 자기 손이 아니라 왕족 이봉과 이항을 시켜 죽였다. 봉과 항은 엄씨 아들이다. 두 후궁 시신은 젓을 담가 산과 들에 뿌렸다. "백 년 안에 처치하지 못한다면, 백 년 뒤에 뼈를 가루낸들 어찌 잊겠느냐?"(1504년 3월 23일 '연산군일기') 세자 시절 게으른 자신을 매섭게 꾸짖었던 스승 조지서도 죽였다. 진주에 내려가 있던 스승을 압송해 고문하다가 질식사하자 머리를 잘라 철물전 앞에 내걸었다. '제 스스로 높은 체하고 군상(君上)을 능멸한(自以爲高 凌蔑君上)' 죄였다.(1504년 윤 4월 16일 '연산군일기') 아들에게 어미를 죽이게 한 때도, 스승 목을 내건 때도 모두 한밤중이었다. 복수는 밑도 끝도 없었다. 방향도 없었다.

'능상지풍'과 '설원미진'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연산군 금표.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연산군 금표. 출입금지 위반 시 사형임을 알리는 폭정의 상징.

이세좌를 사사하던 날 연산군이 말했다. "위를 업신여기는 풍습을 고쳐 없애는 일이 끝나지 않았다(陵上之風革去未殄)."(1504년 3월 30일 '연산군일기')

왕을 능멸하는 '陵上之風(능상지풍·원래는 능멸할 능(凌)이나 실록에는 '陵'으로 돼 있다)'. 조선왕조실록 전편에 95번 나온다. 그 가운데 57번이 연산군일기에 나온다. 얼핏 보면 왕권을 방해하는 신권(臣權)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아무 곳에나 갖다 붙이고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살겠다는 핑계에 불과했다.

처음 나오는 기록은 등극 한 달 뒤다. 폐비 윤씨 사건과 아무 상관없다. "일마다 뜻을 모은 뒤 처리한다면 임금 권한은 어디에 있는가.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陵上之風 不可不革)."(1495년 1월 30일 '연산군일기')

마지막 기록은 1504년 8월 13일 자다. 1504년 가을 한강변 양화도에서 수영대회가 열렸다. 연산군이 강북에서 강남으로 수영 방향을 명했는데, 사람들이 거꾸로 헤엄을 쳤다. 이에 지휘관인 병조좌랑(정6품 하급관리다) 이부(李頫)를 파면하고 장 90대와 노역형을 먹였다.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통틀어 고치려는데(痛革陵上之風) 제 스스로 병조좌랑이라며 교만한' 죄였다.(1504년 8월 13일 '연산군일기')

연산군이 "조정에서 반드시 (요즈음 상황을) 폭정(暴政)이라 할 것"이라고 하자 승지들이 이리 대답했다. "다들 자기 스스로 지은 죄인데 누가 감히요(誰敢以爲暴政乎)."(1504년 3월 23일 '연산군일기') 한 달 뒤 연산군이 이렇게 선언했다. "억울함을 아직 다 풀지 못했다(雪寃猶未盡·설원유미진). 신하로서 이런 자들은 닭이나 개로 대우하리라."(윤 4월 21일 '연산군일기') 복수심이 폭정의 원인이 아니었다. 거꾸로였다. 폭정을 복수심과 왕권 강화로 포장해 세상을 막장으로 몰아간 것이다.

'왕이 그 속에 빠져 오직 날이 부족하게 여기며 흥청 등을 거느리고 금표 안에 달려나가 혹은 사냥, 혹은 술 마시며 가무(歌舞)하고 황망(荒亡)하였다.'(1506년 9월 2일 '연산군일기')

천지사방 암흑세계

1504~1506년 '연산군일기' 기록이다.
조지서와 함께 어린 연산군을 가르쳤던 허침은 살아남았다. 조지서 처형을 결정할 때도 허침은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다"고 동의했다.(1504년 윤 4월 20일) 하지만 늘 퇴근하면 매양 피를 두어 되가량 토하며 분통해하다 죽었다.(김정국, '사재척언·思齋摭言') 신하들은 대부분 입을 다물거나 왕에게 동조했다. 그러다보니 이세좌, 윤필상, 이파 3명에 엮여 처벌된 자가 203명이었고, 나머지 30여 명 족친은 셀 수가 없어 옥(獄)이 수용할 수 없었다.(1504년 11월 30일) 정언(正言) 극론(極論)을 하는 선비가 사라졌다.(1506년 9월 2일) 정치범과 간신배만 있는 막장 정치였다.

사냥과 유흥을 위해 대궐 근처와 경기도 땅에 금표(禁標)를 세우고 백성을 몰아냈다. 임진강 건너편부터 용진, 회암, 용인까지 경기도 내 땅 반 이상이 금표에 들어갔다. 결국 충청도 고을을 갈라서 경기도에 붙였다.(1505년 5월 29일) 연산군은 두모포(서울 옥수동)에 있던 동빙고를 서빙고 옆으로 옮기고 사냥터로 삼았다. 그리로 놀러갈 때 궁녀 1000여 명이 따랐는데, 왕은 길가에서 간음했다(王淫于道傍).(1506년 7월 18일) 처형한 이파, 송흠 묘가 금표 안에 들게 되자 묘를 파헤쳐 시체를 맨땅에 팽개쳤다(曝屍·폭시).

문묘(文廟)도 금표 안에 들어 바깥으로 이전했다.(1505년 1월 25일) 문묘는 기생들이 음희(淫戲)하는 장소가 됐다. 명나라 사신이 오면 금표를 숨겼다.(1506년 1월 21일) 금표를 범한 백성이 너무 많아 안에 사는 사람들을 변방으로 옮기게 했다.(1506년 1월 19일) 천지사방 막장이었다.

파멸의 씨앗, 패륜
'왕이 드디어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의 처 박씨의 집으로 갔다(遂幸月山大君婷妻朴氏第).'(1504년 12월 9일) 왕족 월산대군이 죽고 아내 박씨가 혼자 사는데, 연산군은 세자를 박씨에게 맡겼다. 그러다 정이 들더니 '드디어' 그 집으로 갔다. 이듬해 11월 월산대군 집(지금 덕수궁 자리)이 금표 안에 들자 이를 철회시켜주었다. 세자가 장성해 궁궐로 돌아가자 연산군은 박씨를 궁으로 들여 세자를 보살피게 했고 그러다 드디어 간통을 한(而遂通之) 다음 그녀에게 은으로 만든 도장을 만들어주었다.(1506년 6월 9일)

월산대군은 성종의 큰형이다. 연산군에게는 큰아버지다. 간통한 박씨는 연산군의 큰어머니다. 막장 인생 결정타였다.

박씨가 은도장을 받고 나흘 뒤 남동생 무관(武官) 박원종이 정승급으로 승진했다.(6월 13일) 그때 박원종이 누나에게 말했다. "왜 참고 사는가? 약을 마시고 죽으라."(1510년 4월 17일 '중종실록' 박원종 졸기) 한 달 뒤 박씨가 죽었다. 사람들은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幸於王 有胎候 服藥死).(1506년 7월 20일) 누나가 죽고 40일 뒤 박원종이 동지 성희안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연산군을 끌어내렸다. '중종반정'이다.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돼 두 달 뒤 역질로 죽었다. '아내 신씨가 보고 싶다'고 했다.(1506년 11월 8일 '중종실록') 6년 뒤 신씨는 중종에게 청원해 교동에 묻힌 남편을 양주 땅으로 이장했다. 지금 서울 방학동이다.

이 땅에 남은 그의 흔적은 무덤 하나, 금표 비석 하나, 위치가 확정 안 된 유배지 표석 하나다. 그가 내다버린 시간은 역사 속에 지저분하게 남아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29/201808290005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