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uality/聖經硏究

하나님의 전신갑주

天上 2015. 3. 7. 08:22

하나님의 전신갑주

 

에베소서6:13-17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성령의 검

하나님의 전신갑주 여섯 번째는 성령의 검입니다. 전신갑주 중 유일하게 공격용 무기입니다. 로마군은 글래디우스라 불리는 6-70cm 정도 되는 짧은 검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검은 근거리에서 싸우는 데 매우 유리한 무기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검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여섯 가지 전신갑주 중 유일하게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데 성령의 검은 곧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바로 신앙인들이 악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필요한 검입니다.

다른 종교나 주술에서는 악과 싸우는 각자의 무기들이 있습니다. 부적이라는 것은 액운을 막아준다고 합니다. 일정한 주문을 외우면 악의 침범을 막을 수 있고 어떤 술수를 부릴 수도 있습니다. 한때는 귀신을 쫓아내는 축귀술이나 퇴마술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이런 사술들과 비교하는 것은 매우 죄송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말씀의 효력에 대해서 언급하기에는 이런 식의 비교가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앙인들에게 주신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바로 이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은 그 어떤 주술이나 마법보다 더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의 능력에 대해서 잘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셨습니다. 이 때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았는데 모두 하나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배고픈 예수님에게 돌로 빵을 만들라는 시험을 하였을 때 예수님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며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능력을 보이라는 시험은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마4:7)는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천하만국의 권세를 보여주며 사탄에게 절하면 다 주겠다는 시험은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는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빵과 명예와 권력의 시험처럼 이기기 어려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시험들을 예수님은 신명기서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반대로 말씀의 검을 붙잡지 못함으로 실패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입니다. 에덴동산에는 딱 한 가지 말씀만 있었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그런데 뱀이 유혹을 하였을 때 하와가 이 말씀으로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하와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3:3)며 ‘만지지도 말라’는 말라는 자신의 해석을 덧붙였고 ‘죽을까 하노라’며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 말씀을 약화시켰습니다. 말씀을 놓치자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말씀을 붙잡아야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싸우셨는데 연약한 우리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청년 시절에 제가 붙잡았던 말씀은 시편 119편 말씀입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119:9) 이 말씀을 암송하고 입으로 묵상할 때 유혹이 사라집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이 말씀이 젊은 시절의 나태나 방탕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줍니다. 말씀을 많이 암송하고 말씀을 무기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힘을 잘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그 사람의 모습에 대해서 시편 1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2) 시편 1편은 시편 150편 전체의 머리말에 해당합니다. 시편에 등장하는 다양한 시련과 유혹이 있는데 이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이에 대한 답이 하나님 말씀의 준수에 있음을 밝혀 놓았습니다.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사람이 시편의 이상에 부합하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묵상이라는 단어는 머릿속으로 사색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입으로 읊조리는 것입니다. 묵상이라는 단어 ‘하가’는 다른 곳에서는 비둘기가 구구하는 울부짖음(사38:14), 사자의 으르렁 거리는 소리(사31:4)를 묘사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동양적 사색이 아니라 말씀을 암송해서 입으로 나지막이 소리 내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의 힘이 우리를 유혹에서 지켜줍니다.

말씀의 능력

말씀의 능력에 대해서는 좀 더 언급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존재하셨던 분입니다. 속에 있는 생각은 말로 표현될 때 알 수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말씀으로 계시해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워있는 구유와 같습니다.

창조는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이 가라사대”하고 말씀하시니까 빛이 생기고, 하늘과 땅이 갈라지고, 식물들이 생겨나고, 인간이 만들어졌습니다. 창세기 1장에만 무려 10번에 걸쳐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씀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어떤 물질이나 어떤 솜씨에 대해서 어떤 원인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 말씀으로 세상은 창조되었을 뿐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 사랑은 지극합니다. 율법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율법이라는 하나님 말씀은 세상이 창조되기 2천 년 전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할 정도입니다.

세상은 결국 무너지고 사라져 버릴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만은 영원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40:6) 한국교회 내에서는 창조과학과 진화론의 논쟁이 여전합니다. 창조과학 운동의 비과학성과 성경에 대한 오독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문제는 진화론과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접점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원성에 있습니다. 138억년의 우주 역사, 45억년의 지구 역사, 수백 수십만 년에 이르는 인류 탄생 역사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우주와 물질세계는 하나님 형상을 가진 인간의 탄생을 명령한 하나님 말씀을 좇아 느리지만 어김없이 진화해 왔습니다. 뉴턴의 운동 법칙 중 관성의 법칙이란 것이 있습니다. 운동하는 물체는 계속 운동하려 하고 멈추어 있는 물체는 계속 멈추어 있습니다. 우주 공간에서는 공기나 물체의 방해가 없기 때문에 한 번 힘이 주어지면 그 방향으로 영원토록 지속됩니다. 말씀의 영원성이 이렇습니다. 그 말씀이 성취되기까지 헛되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는 말씀은 보편적 원리를 한가롭게 우리들에게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역사에서 뼈저리게 경험한 하나님 말씀의 영원성입니다. 이사야 40장의 무대는 바벨론 포로기입니다. 바벨론의 압제가 오래되자 희망을 잃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제2이사야 선지자가 외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해방되어 유대 땅으로 돌아가게 되리라” 이 보증으로서 보여주신 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인간의 말은 시들고 사라지지만 내 말은 반드시 성취되며 이루어진다. 그 말씀 그대로 이스라엘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해방이 주어졌습니다.

오늘은 96주년 3.1절입니다. 1919년 3월 1일에 우리 민족은 일제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거국적인 만세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기미독립선언서에서 밝힌 독립의 꿈은 그로부터 26년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독립은 하나님의 뜻이었는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해방을 약속하셨는가? 실제 독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33인 중의 하나인 신석구 목사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뜻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자서전에서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그 후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2월 27일 새벽에 이런 음성을 들었다. ‘4천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않으면 더욱 죄가 아니냐.’ 이 즉시 곧 뜻을 결정하였다.”

이런 식으로 직접적인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의와 평화와 평등과 풍요의 세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입니다. 제국주의에 의한 압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민족이 자유롭게 해방되어 평화롭게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정신은 기미독립선언서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자주 국민인 것을 선언하노라. 이것으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것으로써 자손만대에 일러 겨레가 스스로 존재하는 마땅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 이는 하늘의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므로,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것을 막고 누르지 못할 것이라... 아 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누나. 지나간 세기를 통하여 깎고 다듬어 키워온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 위에 던지기 시작하누나...”

기미독립선언문은 볼수록 명문입니다. 일제의 폭압적 상황에서도 원수를 물리치자며 분노에 호소하거나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 보편적인 인류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편적 인류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정의와 평등과 자존과 번영의 나라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이루고자 하는 이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말씀의 영원성, 말씀의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셨기에 반드시 될 것입니다.

이후 우리 역사도 비록 부족하지만 말씀에서 그리는 세계를 향하여 나가고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참 엉거주춤한 게 많습니다. 해방은 외세에 의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분단과 전쟁도 결국 외세의 힘에 의해서 결정되었습니다. 4.19혁명은 유일하게 성공한 혁명인 듯 하였지만 5.16 쿠데타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유신 독재자는 민중의 힘이 아니라 밀실에서 그의 가신에 의해서 쓰러졌습니다. 87년 민주화 운동도 엉거주춤한 타협의 산물이었습니다. 97년 정권교체도 역시 타협의 산물이었습니다. 그 결과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는 참 비상식적이고 반민주적인 시대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혼란과 미지근한 역사과정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끊임없이 전진해 가고 있음을 믿습니다. 정의 평화 생명의 세계를 향하여 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기에 강력한 폭탄과 같습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1919년 『로마서 강해』를 썼을 때 사람들은 평하기를 “자유주의자들이 놀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발견되고 드러나는 순간 지진과도 같은 강력한 충격이 일었습니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중세 천년에 이르던 가톨릭의 지각을 뒤흔들었던 이유도 하나님 말씀, 곧 성경의 발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민중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볼 수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사제들이 성경을 읽을 때 비로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라틴어 성경뿐이어서 민중들은 가까이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이전에 라틴어 성경을 영어나 독일어로 번역하는 운동들이 일어났고 로마 가톨릭은 이를 탄압했습니다. 최초로 영어로 성경을 번역했던 위클리프는 화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 뒤를 이어서 틴델이라는 사람이 영어로 성경을 번역했고, 마르틴 루터가 했던 가장 중요한 작업도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 바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입니다. 1445년 정도로 추정이 되는데 인쇄술의 발달로 성서가 대량 보급되기에 이릅니다. 그전까지 책 1권을 일일이 손으로 쓰는데 2개월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1주일 만에 5백 권의 책이 인쇄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사람들의 손에 성서가 쥐어지자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말씀의 힘은 이처럼 강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오늘 말씀이라고 할 때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레마’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레마와 로고스를 구분하기도 합니다. ‘로고스’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고 ‘레마’는 성령을 통해서 특별히 감동을 주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구분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성서에서는 특별히 두 단어를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4절이 대표적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레마)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로고스)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가 한 말은 레마로, 성령의 임재와 함께 들린 말씀에는 로고스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말씀이라는 단어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구분법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레마냐 로고스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소유격의 주체가 더 중요합니다. 그냥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냥 검이 아니고 ‘성령의’ 검입니다. 말씀이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능력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말씀을 타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소중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말씀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없는 문자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문자를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고후3:3)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돌 판에 기록된 문자로 읽고 있습니까? 아니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의 말씀으로 읽고 있습니까? 말씀을 통하여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 말씀의 능력은 나타납니다. 로마서 말씀을 읽을 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은 사도 바울에게 말씀하셨던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이 말씀의 능력은 어떤 외과의사의 칼보다 더 날카롭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1) 누가 혼과 영의 경계선을 압니까? 누가 관절과 골수를 예리하게 가를 수 있습니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내 자신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생각과 뜻을 관통하고 계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 놓으십시오.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해야 사는 길인지 알 수 없습니다. 환자가 그것을 다 알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이 유능한 외과의사입니다. 말씀에 내 자신을 맡겨 놓으십시오. 말씀이 치료하고 말씀이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말씀을 굳건히 붙잡고 이를 암송하고 묵상할 뿐입니다. 이 말씀의 은혜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