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uality/聖經硏究

온유한 자의 복 -마태복음 5:5-

天上 2015. 7. 19. 13:15

온유한 자의 복 -마태복음 5:5-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이 시간에 “온유한 자의 복” 세 번째인 온유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람이 태어나 버림받지 않고 구원 받은 것만도 감사한데 하나님께 써주신다면 그것은 영광 중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되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높여주셔서 크고 귀히 쓰임 받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울까요?


그러기 위한 축복의 말씀이 바로 본문입니다.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기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도심의 금싸라기 땅을 선물로 주신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기업이라 했으니 아주 넓고 기름진 땅을 주신다는 말일까요? 만인 가운데 귀히 쓰신다는 말입니다. 옛날 왕이 되면 국가의 영토는 곧 왕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통치자나 지도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국가나 교회나 사회 기업 각계각층에 지도자가 앉을 크고 귀한 자리들이 많습니다. 그 외에도 영적으로 귀히 쓰일 자리가 많습니다.

 

그러나 쉽게 만들어지는 자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온유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온유란 큰 인물을 의미하는 덕이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인격과 인품이 바로 온유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이 온유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깨뜨림이 그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질을 갖추면 큰 인물이 되고 하나님께서 큰일을 맡기십니다.


그럼 온유란 무엇일까요?

 

온유를 말하는 원문의 ‘프라우스’란 “온유한, 친절한, 겸손한, 동정심 많은” 등의 의미로서 자기감정을 제어할 줄 아는 훈련된 인격의 요소를 가리킵니다.


좀 더 설명하면 온유는 다양한 의미가 함축된 말인데 이 온유란 말에는 겸양 친절을 비롯해서, 공손, 예절바름, 신중함, 부드러움, 너그러움, 및 열린 마음 등의 의미가 들어있으며, 또한 거기에는 우리 동양으로 말하면 측은지심, 인의예지, 군자지도 및 경(敬)과 성(誠)의 의미가 다 함축된 말이기도 합니다.


설명할수록 어려워지는데 간단히 말하면 어떤 상황에도 모난 것 뾰쪽한 것이 없이 잘 다듬어진 인격이 바로 온유입니다. 그래서 사나운 짐승을 훈련시킬 때, 사자나 이리 같은 것들을 훈련시킬 때 잘 훈련이 되면 주인이 “프라오스”해졌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연단을 받아 잘 다듬어지고 길들여진 원숙한 인격이 온유입니다.


로데오(rodeo)라는 경기를 아실 것입니다. 미국 서부의 카우보이들이 서로 솜씨를 겨루기 위해 펄펄 뛰는 길들이지 않은 말이나 소를 탄 채 안장에서 떨어지지 않고 오래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아주 위험한 경기입니다.


말도 야생마일 때는 사람을 등에 태우지 않기 위해 그 뛰어난 젊은이들을 떨어뜨릴 만큼 뛰지만 그러나 연단을 거쳐 길이 들여지면 그 거칠고 무책임한 야생마는 기수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명마가 되고 그렇게 고분고분하고 유용할 수 없습니다.


이 온유에 대한 성경 근거는 시 37편입니다. 9절에도 나오고 11절에도 나오는데 11절을 보면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했습니다. 즉 행악자들이 아무리 악행하고 해하려 한다 할지라도 불평하지 말고 투기하지 말고 분노하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래가지 않아 악인은 사라질 것이고 땅을 차지할 것이라.


좋은 차일수록 완충작용이 좋습니다. 이처럼 고통이 없는 것 아닙니다. 있지만 하나님께 맡기고 감정으로 나서지 않아야 합니다. 염려와 걱정이 있어도 하나님께 맡기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최근 영화배우 이ㅂㅎ씨가 자기를 모함하여 수십억을 요구한 동료 연예인을 강하게 조처하니까 이ㅂㅎ을 광고에서 퇴출하자는 운동까지 벌어지는 등 반작용이 만만치 않지요? 큰 배우라면 그만큼 품위도 있어야 하고 그릇도 커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 온유는 지도자가 가질 최고의 품성입니다. 그래서 딤후2:24-25에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하라”고 주의 종들의 첫 번째 덕목으로 온유를 꼽았습니다.


지도자도 급이 있습니다. 단순하고 맹종적인 사병 같다면 지도자가 아닙니다. 지도자는 장교나 장군이나 장관과 같이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면서도 품위를 지켜 지도자로 쓰임을 받기에 모자라지 않도록 그 품성을 다듬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온유란 의기소침하고 비굴하고 의미 없고 맹종적으로 죽어진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서 살되 좀 더 품성이 있게 변화된 사람입니다. 이렇게 다듬어진 품성이 바로 온유인데 이렇게 내가 다듬어만 진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귀하게 쓰실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에 모두 귀하고 큰 인물들은 모두 온유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보세요. 민12:3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크게 쓰신 이유입니다. 본래 모세는 혈기방장하고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의 연단을 거쳐 철저히 부서지고 깨어졌습니다. 그랬기에 지도자 중에서도 큰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어떤 비방과 난동 가운데서도 그 믿음과 그 품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전도여행을 1차 2차 3차로 나눕니다. 그는 전도하다가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교회 밖의 고난도 있었지만 교회 안에서의 고난도 많았습니다. 으뜸 되기 좋아하는 알렉산더 같은 사람은 돕지 않고 온통 사역권을 자기가 쥐고 심히 비방하며 악행했습니다. 많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음에도 바울은 1차를 마치고 2차 3차까지 진행한 것을 보면 그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사역자로서의 역량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큰 인물입니다.


요셉도 얼마나 온유했습니까? 온갖 참을 수 없는 역경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고 미워하는 자와 누명 씌운 자들에게 원한을 갖지 않고 현실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랬기에 애굽의 총리라는 거대한 복을 받았고 자기 가족을 흉년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디모데에게 주의 종은 온유하라고 말씀합니다. 교회가 평안한 것도 주의 종들의 온유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는데 만약 인간관계에서 참지 못하고 사사건건 똑 같이 맞선다면 평안하던 교회는 풍비박산이 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평안도 온유의 크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를 잡으려고 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벤 베드로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눅22:51) 하셨습니다. 제 아무리 베드로가 믿음 좋은 수제자라 할지라도 그 급한 성미 죽이지 않으면 큰 사도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성질 급한 사람이었지만 얼마나 다듬어졌든지 사랑의 사도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일군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사도되기에 치명적인 그 약점을 극복하도록 우레의 아들이라는 부끄러운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우리들도 자신의 어떤 치명적인 인격적 약점이 있다면 별명을 지어 자기를 부끄럽게 해서라도 다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와 함께 다스리기 원하여 낮추시고 깨뜨리는 과정을 거치십니다. 그래서 딤후2:11-12에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만왕의 왕 예수님 아래 수많은 다스리는 왕이 있습니다. 그만큼 세상에서나 하나님 나라에서 영적 역량을 발휘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이웃과 주차 문제로 다툼이 생겼습니다. 성깔이 있는 그 이웃은 윗옷을 벗어 던지고 거칠게 싸움을 걸어옵니다. 그때에 어떤 안수 집사가 나섰습니다. “아니 이게 우리가 교회 다니니까 우습게보고 있어” 하면서 그를 주먹으로 쳤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옳다 잘되었다 하면서 교회 문 앞에 드러누웠습니다.


그리고는 외칩니다...“교회들이 나를 팼다...예수쟁이들이 나를 팼다.” 이제 교회가 큰일이 났습니다. 전도길이 막혔습니다. 결국에 목사가 가서 잘못을 빌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사과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목사는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전교인이 다가서 사과를 하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예배가 끝난 후에 전교인들과 가서 사과했습니다. 이 일에 놀란 사람은 그 사람이었습니다. 전교인이 다 와서 무릎 꿇고 사과를 할 줄 몰랐습니다. 드디어 그분이 나와서 사과를 받아들이고 자기의 잘못도 시인하면서 그 때부터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온유함이 얻어낸 열매입니다. 잘 죽어 온유해야 이런 다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의 광채는 그가 돌에 맞아 죽기 전에 그는 예수님을 본받으며 이미 예수 안에서 잘 죽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용서했으니 나도 용서 하리라. 원수가 있다면 받아들이세요. 주님도 고난을 받았으니 나도 고난 받는 것은 당연하다. 고난도 받아들이세요.


주님도 멸시를 받으셨으니 나도 멸시를 받아들이리라. 내 인생을 허비하는 불합리함도 받아들이십시다.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왜 이런 기회를 주셨는가 생각하면 더 귀한 무엇을 이루는 계기로 준비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머리 둘 곳도 없다 하셨듯 불편하셨으니 혹시 불편한 것이 있다 해도 나는 감사하리라. 나아가 늙음도 받아들이세요. 사람은 나이 들면 늙게 마련입니다. 이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나도 죽으리라.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걸 못 받아들이기 때문에 우울하고 광채가 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용납하고 나면 얼굴에 광체가 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산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 쓰시기 시작합니다. 이런 포기도 온유입니다. 내가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유로서 가장 멋들어지게 인격을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가장 온유하신 분이십니다(마11:29). 얼마나 온유하셨든지 마12:19에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러셨기에 인류 구원의 대 사역을 수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기 위해서 훈련하고 계십니다. 온유함으로 온전히 깨뜨려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만인 가운데 우뚝 세우셔서 진실로 귀히 쓰시는 귀한 일군들이 디 되시기 바랍니다.

가져온 곳 : 
카페 >예림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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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바람날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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